대학원 초년 시절, 공부하기 싫어서 팀 인터넷 커뮤니티의 사진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사실 대학원 일상이란 건 거기서 거기이다. 하나도 궁금하진 않았지만 공부보다는 재미있었기에, 역사를 공부하기 전 팀의 역사를 먼저 살피겠다는 명분으로 시간낭비(?)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 딱 있었다. 우리 팀에 이런 미인이 있었다니 하며 날짜를 보니 무려 10년 전이었다. 당연히 시집갔을 꺼라 여겨 누구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선배 박사 누나와 이야기하다 이성 소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별생각 없이 그 사진 속 여자분처럼 생기신 분이 이상형이라고 이야기했다. 누나는 ‘걔 제주 사는데, 아직 솔로야’라고 말했고, 그 한마디에 난 섬으로 날아갔다. 사진의 주인공을 만나 다짜고짜 결혼하자 했는데 인연이란 게 있긴 있는지 현재 딸 낳고 잘 살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만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남녀가 처음 만나 8.2초면 사랑에 빠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는데 꼭 이성끼리 만나야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역사상 벌어졌던 거대한 일들도 단순히 사람 간의 만남에서 시작된 일들도 많았다.
한니발 바르카
포에니전쟁(BC264~BC146)은 100여 년 동안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국제전으로 바다 연안에 위치한 거의 모든 국가와 부족이 이 사건에 뛰어들었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현재의 튀니지 부근)에 위치하여 무역을 위주로 부를 축적한 기존 강대국이었고,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떠오르는 신흥국이었다. 양 국 가운데 바다에 위치한 시칠리아의 패권을 놓고 시작한 전쟁은 로마의 승리와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막을 내린다. 모두의 예상을 깬 승리였다. 그렇지만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로마가 패배 위기까지 몰린적도 있었다. 바로 2차 전쟁에 등장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BC247~BC181?) 때문이었다. 그는 1차 전쟁 패배를 복수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로 쳐들어간다.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칸나에 전투(BC216)에서 한니발은 로마 공화정 최고 정치지도자를 포함한 로마군 6만 명을 죽이는 등 위명을 떨치며 반도 전역을 공포로 떨게 했다. 여기서 ‘한니발이 문 앞에 와 있다’(Hannibal ad portas)와 같은 우는 아기 달랠 때 쓰는 속담이 생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휘관 1명으로 역량만으로는 강대국을 무너뜨리긴 어려웠던 것 같다. 로마는 본토에서는 지구전을 벌이며 적의 보급을 막고, 해외의 카르타고 영토를 공략하는 전략을 세워 한니발을 아프리카로 몰아낸다. 카르타고본토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 자마 회전에서 한니발은 패배하고 카르타고는 정규군과 국외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는 굴욕적 조약을 맺음으로 사실상 식물 국가로 전락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로마의 승리를 이끈 지도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 BC235~BC183)였다. 그는 측면을 기병으로 포위하는 한니발 특유의 전술을 응용하여나름의 스승을 격파한다. 훗날 이 둘은 한니발이 망명하고 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땅에서 조우하게 된다. 한니발은 왕의 고문으로 있었고, 스키피오는 로마 사절단으로 온 것이었다. 만난 배경이 좋지는 않았다.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였던 안티오코스 3세(Antiochus III, BC241~BC187)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병에 걸려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예들 중 어느 정도 잘 나간다 싶으면 예외 없이 다 이 병에 걸리게 된다. 당연히 안티오코스 3세도 그놈의 ‘대왕’ 칭호를 얻기 위해 사방을 괴롭혀댔다. 로마 공화정은 이를 경계했고 ‘조용히 살아라, 까불면 맞는 수가 있다’라는 전언을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전하러 스키피오를 보낸 것이다. 살벌한 메시지와는 다르게 둘의 만남은 훈훈했다고 한다. 대담 중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장군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장군은 누구입니까?’ 하며 묻자 한니발은 ‘1위는 알렉산드로스, 2위는 피로스, 3위는 나’라고 대답한다. 스키피오가 웃으며 ‘자마전투에서 자신을 이겼다면?’이라고 묻자 ‘그럼 내가 첫 번째 일 것 이오’라고 대답한다. 허구라는 주장도 있지만 세계대전의 맺음말로 더할 나위 없는 에피소드이다. 대가들의 품격이 느껴진다. 다만 둘의 말년은 썩 좋지 않았는데, 한니발은 로마에게 이곳저곳으로 쫓기다 자결하고 스키피오 역시 정계에서 실각한 후 화병으로 죽는다. 그리고 별로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아까 언급한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의 경고를 씹다가 마그네시아 전투(BC190)에서 처절히 발린 후 정적에게 암살당한다.
에르난 코르테스
15세기 스페인은 들끓는 힘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800여 년에 걸친 레콩키스타(Reconquista, 고토 재정복) 운동 끝에 1492년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와중에 형성된 무력집단들은 사회의 불안요소가 되고 있었다. 마침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내 ‘인도’로 발표한다. 이에 넘치는 물리적 에너지를 외부로 분출시키면서 인생역전을 위해 황금이 넘친다는 신대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떠난다. 종교적 의무에서 벗어나 개인적 욕망에 충실한 나름 르네상스 적이었던 이들을 콘키스타도르(Conquistador)라 부른다. 이 중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1485~1547)라는 사람이 있었다. 갈 곳 없지만 힘은 센 부랑자들이 주류이던 콘키스타도르에서 에르난 코르테스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귀족 출신에 법학교육도 받은 어느 정도 사리분별이 가능한 교양인이었던 것이다. 쿠바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코르테스는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했다. 상급자이자 큰 동서였던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말리는데도 아즈텍 제국(현재 멕시코 지역)을 정복하려고 600명의 병사를 모아 떠난다. 하지만 무기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현 멕시코시티)은 인구 20만이 넘는 대도시였다. 수백 명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아즈텍 제국은 철기시대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엄청난 옥수수의 생산량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석기 문화로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아즈텍 제국의 불안요소를 알아낸다. 아즈텍 제국은 수많은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나라를 운영하던 지배층이 피지배인들을 수없이 잡아가 인신공양을 하는 바람에 이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즈텍 제국은 종교적 이유에서건, 식인을 위해서건, 피지배민족에 대한 효율적 통치를 위해서건 인신공양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었다. 이는 허구한 날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던 스페인인들에게도 질겁할 일이었다.
금지된 사랑을 한 말린체
이 와중에 코르테스는 한 부족에게 노예로 끌려와 있던 말린체(Malinche, 1496~1529)라는 여성을 만난다. 스페인인들은 이 여성을 마리나로 불렀고, 원주민들은 ‘정복자의 여자’라는 뜻으로 말린체라고 불렀다. 그녀는 각종 언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도 금방 배워 스페인인들과 주변 소수민족 사이의 통역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인들과 아즈텍 피지배 종족 연합군이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할 때 길잡이로 앞장서기도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러 성공요인이 있는데, 천연두와 같은 병원균, 무기의 차이(칼과 총 vs 석기 곤봉), 전투 방식의 차이(살육 vs 포로 획득), 아즈텍 피지배민들의 협력 등을 들 수 있겠다. 코르테스와 말린체는 사이가 좋았는지 아이 여러 명을 낳았다. 원주민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나 몰라라 했던 대다수 정복자들과는 달리 상대적 교양인 코르테스는 자식들을 정식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 교황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덕분에 코르테스와 말린체 슬하에 난 일부 자식들은 적자로 승인되었으며 큰 아들 마르틴 코르테스는 스페인 귀족 기사단인 산티아고 기사단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이들을 메스티소(Mestizo, 유럽인과 아메리카인들의 혼혈)의 시작으로 여기기도 한다.그리고 코르테스 사망 후 조용히 사라졌던 말린체는 멕시코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이완용 급의 민족 배신자로 취급되기도 한다.여성주의 일각에서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선구자로 인정하기도 한다.
바부르와 나나크
16세기 인도 대륙은 종교와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다. 종교는 크게는 이슬람교와 힌두교로 나뉘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패권국 없이 여러 군주국들이 사방에 난립하여 하루도 분쟁이 그치는 날이 없었다. 이 와중에 한 사나이가 태어났으니 그 이름은 구루 나나크(Guru Nanak, 1469~1539)였다. 구루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나나크는 어느 날 자신을 따르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게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나무 아래서 명상하고 있던 그는 ‘힌두도 없고 이슬람도 없다’를 외치며 일어선다. 그리고 모든 신은 유일신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진리는 하나라는 시크교(Sikhism, ‘가르침’ 혹은 ‘학습’이라는 뜻)를 창시한다.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장점을 따서 카스트 제도와 같은 불평등을 없애고 금욕하며 평화를 사랑하자고 가르쳤다. 구원은 선행과 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외쳤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끝도 없는 교리 싸움과 실제 주먹다짐에 대중들은 지쳐있었다. 나나크의 주장은 한 줄기 빛이었고 이 남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점차 늘어났다.
시크교도의 니항
이 와중에 인도 북서쪽에서는 이슬람교를 믿는 정복자 바부르(Babur, 1482~1530)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북인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나크는 제자들은 대피시키고 자신은 잡혀간다. 감옥에서 맷돌로 옥수수를 갈고 있었는데 그가 저명한 성직자라는 사실을 안 바부르가 나나크를 부른다. 바부르는 나나크에게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한다. 나나크는 처음에는 어차피 다 정복했는데 무엇하러 그러느냐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 잡고, 백성을 자애롭게 다스린다면 당신의 자손들이 인도를 천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바부르는 나나크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좋아하던 마준(maajun)이라 불리는 대마 사탕을 권한다. 금욕을 중시하던 나나크는 이를 거부하며 시크교 찬송가(Shabda)를 인용해 이렇게 말을 한다. “신이 저에게 마약입니다. 저는 신에 취해 모든 것을 잊고 삽니다.” 무굴제국을 세우게 된 바부르는 이 때문만은 아니고 죽일만큼 죽였기에 이제부터라도 선정을 베풀려고했지만 곧 사망한다. 약 150년 정도 후 바부르의 후손 아우랑제브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하며 실제로 시크교의 교주 테즈 바하두르를 처형한다. 교주의 아들이자 나나크의 후손 고빈드 싱(Guru Govind' Siṃh, 1666~1708, 싱은 사자라는 뜻)은 이에 격분하여 교단을 군사결사단체로 변모시킨다. 시크교도들은 타교와 차이를 두기 위해 머리를 길렀다. 이때부터 이들은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터번을 쓰고 다니게 된다. 고빈드 싱은 신도 조직을 칼사(Khalsa, 순수한 군대)라 이름을 붙이고 ‘니항(Nihang, 불사)'이라는 무사집단을 만들어 무굴제국에 대항하고자 했다. 교리에서 술과 담배는 여전히 금했지만 대마는 전투를 잡념 없이 하기 위해서 허용되었다. 열심히 싸우려면 신에 취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마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우랑제브는 시크교만 탄압한 것이 아니고 힌두교도들 역시 개종하라며 괴롭히고 있었기에 필연적으로 사방에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할아버지들 말을 듣지 않았던 자손들 때문에 무굴제국과 시크교 및 힌두교는 끝없는 내전을 벌이게 되고, 이 분열에 영국이 옳다구나 하며 뛰어들어 무굴제국은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현재에도 여전히 시크교와 힌두교의 인도, 이슬람교의 파키스탄은 사이가 좋지 않다.
지금까지 큰 사건의 후일담 격인 만남, 지구의 역사를 바꾼 금지된 만남,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긋지긋한 만남의 시작 이야기를 전해 드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만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역사상 벌어졌던 거대한 일들도 단순히 사람 간의 사적인 만남에서 시작된 일들도 많았다. 그걸 보면 어떤 만남도 가볍지는 않은 것 같다. 굳이 역사를 들먹이며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살다 보니 과거의 별생각 없었던 한 만남이 현재의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도 겪게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작은 만남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
덧붙이는 말 : 여기에 올라왔던 역사 관련 글은 제가 근무하는 제주도교육청 잡지 '월간제주교육'에 연재하던 것에 살을 좀 붙인 글입니다. 이번에 제가 연재도 종료하게되었고, 그동안 주제가 약간 중구난방이었던 것 같아서 이제는 무언가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하나를 써보려구요. '이번 달에는 뭘 쓰지?' 고민하다가 생각나는 거 쓰고 그랬거든요. 다음번에 쓰려고 하는 것은 조금 더 고민해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아내가 무섭거든요. 혹시(?) 역사 관련 글을 재미있게 보셨던 분들이 계셨다면 계속 올릴 가족이나 일상에 관한 글들 읽어주시며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동안 역사와 문화 이야기 한 번이라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새해에 더 건강하시란 말씀도 함께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