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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Aug 10. 2020

8월15일, 인도 독립의 날

인도의 독립과 분열

근대 제국주의는 세상에 많은 것을 새겼다. 인종차별, 우생학, 사회진화론을 넘어 최근까지 저개발 국가들의 내전과 분열, 국제자본에의 종속 등등 셀 수 없는 악행들을 남겼다. 사회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 치자. 여기에 반쯤 농담으로 “이게 다 제국주의 때문이다!!”만 외쳐도 50~60%는 들어맞을 정도이다. 개중 티가 나게 남겨준 유산 하나는 무수한 ‘광복절’들을 각국에 선물해준 것이다. 그 덕에 기념일만 가지고도 식민지 경험이라는 그 나라의 과거를 대강 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도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과 ‘해방기념일(Liberation Day)’의 개념적 차이가 있고, 독립을 선언한 날과 실제 주권을 행사하게 된 날의 차이가 있다. 그러니 광복절이 있다고 하여 식민지를 겪었다는 것으로 완전히 단정할 수 없긴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일절을 영문으로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Day’으로 표기하고 광복절을 ‘National Liberation Day of Korea’로 써서 양자의 차이를 밝히고 있다.( 광복절을 ‘Independence Day’로 쓰기도 한다, 출처 :https://elaw.klri.re.kr/kor_service/lawView.do?hseq=34678&lang=ENG) 아무튼 그래도 꽤 많은 나라들이 제국주의 국가, 특히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기념일 날짜가 8월 15일로 같은 나라도 두 나라나 된다. 하나가 인도 공화국이고 다른 하나는 콩고 공화국이다. 이번에는 인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India’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큰 강’을 뜻하는 ‘Sindhu’이다. 이를 인더스 강 너머 살고 있던 페르시아인들이 ‘Hindu’라고 불렀고 다시 그리스인들이 듣고는 ‘Ἰνδία’라 부른 데서 기원한다.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땅은 너무도 넓어서 ‘유사 대륙’이란 뜻의 ‘인도 아(亞) 대륙’이라 불린다. 남동쪽, 남서쪽, 남쪽은 인도양으로 둘러 쌓여있고 북쪽은 히말라야 산맥이 버티고 있어 어떻게 보면 상당히 폐쇄적인 지형이기도 하다. 사람도 많이 사는 그렇게 큰 지역에 사방이 막혀있으니 ‘카스트’와 같은 특이한 계급제도가 생겨난 모양이다. 인류 지식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무엇보다 ‘0’을 창안해냈고 초기 숫자들을 최초로 사용했다. ‘1,2,3...’과 같은 숫자는 보통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져 있으나 인도에서 처음 발명된 것을 아랍인들이 가져다 확대 보급한 것이다. 이 덕택에 중세 이후 서구인들은 ‘432’를 로마 숫자인 ‘CDXXXII’로 쓰지 않아도 되었다. 예전에는 로마 숫자로 곱셈도 했다고 하니 고대인은 정말 대단하다. 그 외에도 힌두교와 불교가 인도 아대륙에서 출현했고 인도인들은 모든 것은 돌고 돈다는 윤회사상을 퍼뜨렸다. 인류문명은 항상 진보한다는 선형 세계관에 의문을 품었던 많은 철학자들이 인도의 윤회 사상을 통해 새로운 해답을 얻기도 했다.


악바르 대제


이런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당시에 힌두교와 이슬람교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원래 인도에서 유래한 고유 종교는 브라만교-힌두교였다. 이들은 세상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하면서 현생의 삶은 지난 삶의 업보라 했다. 당연히 현실 순응적으로 내세를 기원하며 공을 쌓으며 살자고 했다. 불교도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이미 굽타왕조 시기(320~550 시기 북인도를 지배한 왕조, 인도 고전문화의 전성기를 열었다)부터 힌두교에 섞여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었다. 이에 반해 이슬람교는 인도가 아닌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AD 8세기 이후부터 인도인들을 부단히도 괴롭혔다. 척박한 서아시아에서 온 무슬림들은 풍요로운 인도 땅이 탐이 났던 모양이다. 마침내 북서쪽 최후의 침략자 아프가니스탄 출신 바부르(페르시아어로 호랑이라는 뜻, Babur, 1483~1530)는 인도를 거의 통일하고 무굴제국을 세운다. 무굴은 인도 사람들이 ‘몽골인’을 부르던 말이다. 참고로 인도 중남부에는 데칸고원이라는 험준한 지형이 있어서 인도 북부를 지배했던 정복자들은 이 고원을 넘으려다 지쳐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히 남부는 늘 따로 놀았다. 무굴제국도 인도 아대륙 최남단 까지는 정복하지 못했다. 아무튼 무굴제국의 국교는 당연히 이슬람교였다. 그래도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 1542~1605, 무굴제국의 3대 황제로 관용정책을 피며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때는 힌두교 등도 차별받지 않는 종교 융합정책을 피면서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열기도 한다. 하지만 배타적인 일신교의 특성상 이 관용정책은 머지않아 철회되고 알라가 아니면 죽음인 시대가 열린다. 제국 내의 힌두교, 시크교인(인도인 나나크가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절충하여 만든 종교)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된다. 핍박받던 이들이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8세기부터 인도를 침략한 집단은 거의 이슬람교를 믿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인도인들은 자기들을 맨날 괴롭히던 이슬람교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다. 거기에 정부가 종교 때문에 탄압까지 하자 곳곳에서 들고일어났다. 종교를 그렇게 만만히 보면 안 됐다. 마라타 연합과의 분쟁(1680~1707, 무굴제국과 인도 서부 마라타 지방과의 전쟁. 이 전쟁으로 무굴제국은 쇠퇴한다) 등 사방에서 내전이 터졌다. 그리고 무굴제국은 쪼개진다. 이를 잘 이용하고 분열된 토후국들을 잘 이간질하여 영국이 인도 땅을 홀랑 집어삼켰던 것이다.



힌두교의 여러 신들,  왼쪽부터 시바,비슈누,브라흐마



힌두교는 유독 이슬람교랑 잘 맞지 않았다.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는 수직적인 제도 같지만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서 다 같이 형제라는 의식이 있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고 사실 차별 맞고 없어져야 하는 악습이다. 반대로 이슬람교는 애초에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므로 알라를 믿지 않으면 악마 그 자체로 생각했다.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이분법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런 둘이 만났으니 뭐가 될 리가 없었다. 힌두교가 비록 외부에는 좀 약했지만 안방에서는 호랑이였다. 그 끈질긴 공산주의도 결국 포기한 게 인도였다. 계급투쟁을 줄기차게 외쳐도 ‘내가 저번 생에 잘못해서 그래. 이번엔 잘해서 다음에는 브라만 계급으로 태어나지 뭐...’하는 게 힌두교 신자들이었다.



이 갈등으로 중간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인도를 통일시켜줬느니 발전된 민주주의를 알려준다니 하며 온갖 생색을 내고 있었다. 물론 영국인들의 지배가 나름 인도적인 측면도 있었다. 노예제를 철폐하고 사티(Satī)라 불리는 과부 순장 풍습, 여아 살해 관습을 금지시켰다. 정치적으로도 인도인들의 저항을 억누르지만은 않고 지방자치를 점차 확대하고 의회 제도를 도입하는 등 나름 긍정적인 영향도 미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경제적으로 인도는 영국의 원자재 제공 기지와 상품 수출 시장으로 실컷 빨아 먹히고 있었다. 영국 정부의 특허를 받고 대리 통치를 하던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는 스스로 지주가 되어 농민들을 착취하고, 아편과 차를 강제로 재배시켰다. 보통 인도에서는 수확량의 6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것이 관례였는데, 동인도회사는 50%를 토지세(명목은 정액제였지만 가장 풍년의 해를 기준으로 하여 결과적으로는 반을 세금으로 걷었다)로 걷고 그 외의 세금도 뜯어갔다. 농민들이 세금을 내려면 농작물을 내다 팔 수밖에 없었다. 곡물은 무제한적으로 국외로 유출되었다. 주민들은 늘 기근에 시달렸다. 굶주림은 일상이었다. 벵골 대기근(1770) 같은 경우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는 보고도 있다.  



세포이 항쟁



불만이 쌓여있던 인도인들은 세포이 항쟁(1857~1859)을 통해 분노를 폭발시켰다. 영국은 꽤 많은 사상자를 내며 저항군을 진압한다. 당연히 상호 간 많은 학살이 벌어졌다. 다만 인도 대륙 모두가 세포이의 편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네팔, 펀잡(인도 서북부, 지금은 둘로 나뉘어 인도와 파키스탄에 속해있다)등의 토후국이나 시크교도 들은 영국의 편을 들어 세포이들과 싸운다. 시크교도들은 세포이들을 백인들보다 훨씬 증오했다. 세포이들은 자신들을 탄압했던 무굴제국을 옹호하고 있어서였다. 이 사건을 겪으며 영국은 인도에 대한 직접 통치에 나선다(1858). 하도 양아치 같은 짓만 골라서 해 정부에 의해 점차 권한을 빼앗겨 행정부 산하 기구로 전락했던 동인도회사는 해체되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무굴제국의 황제 자리를 빼앗아 인도제국 황제가 된다(1876). 덕분에 영국은 그동안 로마제국과 인연이 없어 황제를 자처하지 못했는데 인도를 발판 삼아 편법으로 제국 소리를 듣게 된다.  



영국이 인도에 진출하면서 일부 인도인들은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영어를 익히고 앞선 유럽의 기술을 배워 인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영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육성한 중간 토지 지주층과 함께 인도에서 친영세력의 주축이 되었다. 유학생들은 무굴제국과 같은 구체제나 힌두교 사상이 기반이 된 인도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도국민회의(1885년 영국이 친 영국적인 인도인들을 통치에 협력시키기 위하여 목적으로 구성한 조직)와 같은 인도인 자문단체가 생겨난 이후에 이들은 인도가 대영제국 내의 자치권을 가진 지역이 되기를 바랐다. 순진했던 건지 아니면 영국이 표방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믿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장차 인도인과 영국인들과 동등해질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렇지 않았다. 식민지 정부 관리를 선발하는 인도문관시험은 인도인을 대놓고 차별했고, 인도 내 영국인들은 미개한 인도인의 판결을 받을 수 없다고 소리를 높였다. 각종 세제나 생활에서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벵골지방의 위치, 오른쪽 위편이다



이런 여러 균열들이 영국의 벵골 분할령(1905~1911)을 통해 수면으로 부상한다. 벵골은 인도 북서쪽의 지방으로 버마와 맞닿아있는 곳이다. 이곳은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이 함께 살았는데 영국은 통치의 효율을 내세우며 힌두교도가 다수인 서벵골과 무슬림들이 많은 동벵골로 나누려고 했다. 대표적인 무장 반영운동인 세포이 항쟁의 주력군이 벵골 출신이었던 것을 볼 때 이 지역은 영국에 대한 적대감정이 꽤나 높은 곳이었다. 벵골을 쪼개려고 한 것은 당시 영국이 허용하고 있던 지방의회선거에서 보다 영국에 부정적인 지역의 지분을 낮추고 친영적인 세력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로마 공화정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국가의 유구한 통치기법인 ‘분리하여 통치하라’(divide et impera)의 인도 버전이었다.



힌두교도는 즉각 반발했고, 무슬림은 환영했다. 힌두교도는 인도국민회의를 통해 절대 벵골은 분리될 수 없다며 스와라지(Swaraji, 자치), 스와데시(Swadeshi, 국산품 사용), 민족교육, 영국 상품 불매 등을 4대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며 대영 투쟁에 나선다. 원래 인도국민회의는 친 영국적인 인도 지도자 계층의 모임이었는데, 벵골 분할령을 시작점으로 인도 독립 시까지 온건파를 제치고 강경파들이 단체의 주도권을 잡는다. 훗날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립 과격파들은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이자는 주장도 하게 된다.



마하트마 간디


반면에 무슬림은 인도국민회의에 맞서 전인도무슬림동맹’을 출범시킨다. 이들은 벵골 분할을 반대하는 이들이 민족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힌두교 우위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무굴제국을 멸망시킨 영국이 싫어 영어도 배우지 않다가, 영어를 배운 힌두교도들이 관리도 되고 정치인이 되는 것을 보며 서구 문물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무슬림들이었다. 이들은 벵골 분할령을 기점으로 완전히 친 영국으로 기운다. 그동안 소수였던 벵골 지방에서 동쪽이 분리된다면 자신들이 다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뜻이었을까. 그래서인지 국산품 애용에도 시큰둥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영국에 지속적으로 로비를 시도해 인도의 지방선거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따로 투표하는 분리 선거제를 관철시킨다(1909).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인도인들은 적극 참여했다. 약 120만여 명이 모집되었고, 그중 10%가 사상자였다. 그 시기 ‘전쟁영웅’의 칭호를 얻고 대중 앞에 부상한 이가 바로 인도의 국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이다. 전쟁에 막대한 희생을 치른 인도인들의 정치참여 요구를 영국을 외면할 수 없었다. 세계대전은 인도인들의 정치적 권리를 향상해줬을 뿐 아니라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일시적 화해도 만들어줬다. 영국이 전쟁 중에 터키를 공격하자, 인도 무슬림들은 ‘칼리프의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고 버텼고 힌두교도들이 편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다만 아주 일시적이었고 곧 다시 틀어졌다.



여러 차례 개정된(1858, 1871, 1909, 1912, 1919, 1935) 인도통치법령은 인도인의 정치적 공간을 점차 넓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경제적 여건이 악화되고 있던 영국은 인도와 같은 거대한 식민지를 강제로 운영하기 어려워졌다. 이미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Statute of Westminster, 자치령에게 외교권과 군사권을 부여하여 본국과 동등하게 하는 내용을 담았다)으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은 자치령이지만 실질적 독립국으로의 지위를 얻었다. 인도인들도 역시 정치 권한의 확대를 요구했다. 이때 간디는 비폭력 비협조 불복종으로 대표되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라는 뜻) 운동을 통해 인도 지도자로 우뚝 선다. 그는 인도인들에게 부과되었던 소금세 철폐를 주장하며 긴 행진을 벌였다. 이 와중에 식민지 정부와 인도인들 간에 유혈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소금행진 중인 간디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영국 정부는 인도의 힘이 꼭 필요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전후 인도를 자치령, 즉 실질적 독립국으로 독립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1942). 강경파들은 영국이 즉시 물러나기를 원했지만 네루와 같은 대다수 지도자들은 영국과의 타협점을 찾으려고 한다. 힌두교 측은 통일 인도를 원했다. 그렇지만 무슬림들은 분리를 주장했다. 다수의 힌두교가 권력을 차지할 경우 종교탄압을 우려해서였다. 인도의 무슬림들은 1940년 라호르 집회에서 이미 인도와 갈라설 것을 결의해 놓았었다. 간디는 인도의 분열을 막으려고 이슬람교 지도자들에게 선 독립, 후 분리 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라는 반응이었다.


파키스탄의 국부, 무함마드 진나


종전이 되고 영국과 힌두교, 이슬람교 간에 3자 협의가 벌어진다. 타협은 실패했다. 이에 이슬람교 지도자 무함마드 진나(Muhammad Jinnah, 1876 ~ 1948, 훗날 파키스탄의 국부)는 분리 독립을 위해 1946년 8월 16일을 즉각 행동일(Direct Action Day)로 선포하고 총파업을 결의한다. 비극적이게도 이날을 기점으로 캘커타에서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의 유혈충돌이 벌어져 6천여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3만 명, 재산피해자 10만여 명이 발생했다. 이 사태는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동벵골, 비하르-펀잡(인도 북서부, 현 파키스탄) 같은 이슬람교 우위의 지역에서는 힌두교에 대한 보복이 일어났다. 결국 이 비극을 계기로 둘은 인도와 파키스탄(펀자브(Punjap),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imir), 신드(Sind), 발루치스탄(Baluchistan)을 합쳐 만든 국호)으로 완전히 갈라선다. 파키스탄은 1947년 8월 14일 오후 11시 57분에 독립을 선언한다.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오전 12시 2분에 독립을 공표한다. 파키스탄이 14일을 고집한 것은 15일이 금요일이었고 그 날은 무슬림이 지켜야 하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즉각행동일



분리가 합리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이 다수더라도 지방 지도자가 인도에 기울어 인도에 붙어버린 지방도 있었고, 아예 무력으로 선점한 지역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현재도 싸우고 있는 카슈미르 지방(인도와 중국, 파키스탄의 경계에 있는 산악 지대)이다. 1947년 10월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고, 1965년, 1971년에도 싸웠다. 특히 1971년 전쟁에서는 말 많고 탈 많은 동벵골이 독립한다. 동벵골은 1947년 분리 때 무슬림 편에 서서 파키스탄으로 독립했지만 파키스탄은 동벵골은 식민지처럼 통치하며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탄압했다. 같은 무슬림에게 속박되어 있던 동벵골은 인도의 도움으로 방글라데시(벵골인들의 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후에도 1999년 카길 전쟁이 터져 양 측 합쳐 천여 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웃픈 이야기는 2019년 분쟁에서 인도군이 보유한 한국제 자주포 K-9이 파키스탄이 가진 중국제 자주포를 수적 열세에도(10문 vs 36문)에도 일방적으로 발라버린 일이 있었다. 만족한 인도 육군 지휘부가 K-9을 더 빠르게 배치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핵까지 보유한 두 나라는 최근에도 서로 각오하라며 드잡이를 끊이지 않으니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인도의 독립과 분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독립한 날짜도 같고 원래 한 나라였다가 갈라선 것도 비슷해서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이 두 나라는 앞으로도 화해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이긴 하지만 부디 우리는 요즈음 어려운 상황에도 평화를 모색하는 길을 찾아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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