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로 신혼여행 갔을 때의 일이다. 남들 하는 건 다 해보아야 하는 아내 덕분에 유명한 카페에 앉아있었다. 주변에 유럽인들은 없고 한중일 사람만 득실득실해서 명동에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아내는 비엔나커피를 드시고 카페인 못 먹는 나는 콜라를 주문했다. 잘 차려입은 종업원이 다가왔다. 10분은 닦은 듯 한 눈부신 은쟁반에 캔과 이것저것 얹혀있었다. 그는 내 앞에 냅킨을 깔고 잔 받침을 놓고 유리잔을 내린 다음 따로 통에 담아온 얼음을 정성스레 담아준 후 굉장히 멋있게 깡통 뚜껑을 따서 콜라를 따라주었다. 그 모습을 아내가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자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나는 물어보지도 않은 내용을 그녀에게 주절주절 설명했다. 「오스트리아 군인들은 전쟁 때도 이렇게 먹었대」. 아내가 갑자기 외쳤다. 「아, 이제 왜 얘네가 맨날 독일한테 안됐는지 알았어!!」.
그랜드투어를 떠나는 귀족들
이처럼 여행은 백번의 독서보다 더 많은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서구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아예 근대가 시작되던 17~19세기에는 대학교육보다 여행이 더 좋다며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는 프로그램이 유행하기도 했다. 특히 영국에서 성행했던 이 행사는 청년 귀족들이 가정교사와 함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적지들과 유럽 대도시들을 돌아보며 지적 체험과 여러 경험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도 이런 풍조의 연장선상에서 쓰인 것이다. 물론 초창기의 좋은 의도는 금방 돈 자랑으로 변질되었고, 젊은이들은 르네상스 사상보다는 술, 도박을 먼저 배우게 되었다.
캐나다를 향해가는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들
바이킹들 사이에는 ‘집에서 자란 아이는 바보가 된다’(a fool is the home-bred child)라는 속담이 있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수많은 바이킹들이 고향을 뛰쳐나갔고 바보가 되는 대신에 많이 죽었다. 사실 이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여행이 아닌 ‘모험’에 가까웠다. 바이킹들은 춥고 척박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환경에 살아야 했다. 동물들도 춥다고 도망가 사냥도 못하는 땅에 농사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약탈과 무역만이 바이킹들이 살 수 있는 길이었다. 사회에서 집단적 합의가 강조되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 자본과 노동, 국가가 참여하여 합의하에 사회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 전통이 북유럽에서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불협화음을 내는 순간 전체의 생명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장남에게만 모든 것을 몰아줬기에 차남 이하 남자들은 외화벌이나 하러 떠나야 했다.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서 ‘바랑기안 친위대’(Varangian Guards) 같은 용병이 되기도 하고, 카프카스 지방으로 가서 이슬람 인들과 무역을 하기도 하고, 프랑스에는 노르망디 공국을 이탈리아에는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차남 용병단’은 이런 관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무튼 보통의 바이킹보다 모험심이 ‘더’ 뛰어난 이들은 서쪽의 대서양으로 떠나기도 했다. 이들이 얼마나 용감했냐면 바이킹들은 생각보다 바다를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바이킹들의 신화에서 인간의 땅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요르문간드’(Jormungand)라는 뱀이 그 바닷속에 잠들어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라그나로크’라 하는 세계 종말의 때에 그 뱀이 올라와 분탕질을 할 예정이라 전해졌으니 괜히 먼바다에 나가서 요르문간드를 깨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프 에릭손(Leiv Eiriksson, 970 ~ 1020, 그린란드를 발견한 붉은 머리 에리크의 아들. 캐나다를 탐험했다)과 같은 ‘더’ 용감한 바이킹들은 서쪽으로 가서 그린란드를 포함한 캐나다 북부도 발견했다. 다만 이들은 ‘더더’ 성격 더러운 캐나다 원주민들과의 싸움을 견디다 못해 그린란드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북유럽보다 ‘더더더’ 척박한 땅인 그린란드에 ‘초록 땅’과 같은 좋은 지명을 붙인 이유는 이름이라도 좋아야 사람들이 이주해 올 것이라 여겨서 그랬다. 덕분에 순진한 바이킹들이 이민사기를 꽤 당하기도 했다.
이브라힘 벤 야쿠브의 여행경로
역마살은 바이킹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슬람 인들이 더 했다. 아예 이들은 ‘핫즈’(hajj)라 불리는 ‘성지순례’를 신자의 의무에 박아버렸다.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집돌이들도 인생에 한 번은 끌려 나가야 했다. 그리스도교도들도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만 강제는 아니었다. 덕분에 이슬람 지식인들은 여행을 하며 이런저런 여행기를 많이 남기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여행한 아부 둘라프 알 무할힐(10세기경), 북아프리카의 기록을 남긴 이븐 주바이르(1145~1217), 중앙아시아, 중국, 북아프리카 받고 동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까지 둘러본 이븐 바투타(1304~1368)까지 이슬람 세계에는 유명한 여행가들이 많았다. 중세 서아시아 구전 이야기들이 담긴 「천일야화」(Alf layla wa-layla, One Thousand and One Nights)를 보면 지리적 배경이 이베리아 반도와 같은 남유럽에서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동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중앙아시아, 중국, 동남아시아를 포괄하고 있는 것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알라딘이 괜히 중국 출신이 아니고, 신드바드가 보물 찾으러 떠난 섬이 우연히 스리랑카가 아닌 것이다. 따지고 보면 유럽보다 훨씬 인도양 세계는 고대부터 교류가 있어왔고 고향 떠나 다른 동네 가서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슬람 여행가 중에는 바이킹 마을을 구경 간 사람도 있다. 이브라힘 벤 야쿠브(abraham ben jacob, 10세기)라는 상인이다. 그는 알 안달루스(al-Andalus, 이슬람 지배 하의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 출신이며 유대인이었다.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그는 덴마크의 헤데비(Hedeby)에 이르렀다. 현재의 유틀란트 반도(독일 북부와 덴마크를 연결하는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동서남북 유럽인들이 만나는 무역 중심지였다. 이브라힘 벤 야쿠브는 헤데비를 두고 ‘세상 끝 바다에 있는 큰 도시’(very large city at the very end of the world's ocean)라고 묘사했다. 따뜻하고 잔잔한 지중해만 봤던 그에게 시커멓고 차가운 북해는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바이킹들이 보기에 헤데비는 참 살만한 곳이었을 텐데 말이다.
무역도시 헤데비
동아시아의 경우는 어떨까. 통치체계가 비교적 오래전에 완성된 동아시아의 왕조들은 여행을 금기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농업 위주의 중앙집권 국가가 고향에서 농사나 짓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군상들을 당연히 좋아할 리 없었다. 특히 당시에 농민은 군인과 같은 개념이었기에 사방을 배회하는 무리가 늘어나면 날수록 정부에는 부담이 되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국가 위협세력으로 변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아시아에서 여행이란 지배층의 전유물인 경우가 많았다. 하기는 있는 사람이 돌아다녀야 여행이지 없는 사람이 돌아다니는 건 유랑 걸식이다.
서유기 삼장법사의 모티브가 된 현장
물론 예외는 있었으니 해외에 나가고 싶으면 종교인이 되는 방법이 있었다. 중국의 승려들에게 있어서 천축(인도)은 최고의 핫 플레이스였다. 기회비용이 목숨이라 조금 비싸기는 했지만 천축만 찍고 오면 불교계의 아이돌이 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법현(337?~422?), 당나라의 현장(602?~664)과 의정(635~713)이다. 이 스님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불국기」(佛國記, 법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현장),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의정)과 같은 기행문으로 남기기도 했다. 개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현장이다. 이때 당나라는 당태종 통치시기로서 국법으로 사사로이 국경을 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티베트, 돌궐, 고구려 등등 동서남북의 대부분의 나라와 싸우고 있던 때라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천축에 가고 싶다고 탄원서를 냈다가 번번이 거절당한 현장은 국경을 넘어 떠난다. ‘죽은 사람의 뼈만이 길잡이가 된다’라고 했던 법현의 말대로 실크로드는 죽음의 길이었다. 현장도 ‘사방이 망망대해라 갈 곳을 찾을 수 없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호가 있었던 것인지 현장은 천신만고 끝에 천축에 도착해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된다. 정작 그때 인도는 불교세가 한풀 꺾인 채 힌두교가 더 우세해지고 있었다.
현장의 여행경로
아무튼 장안을 떠난 지 17년 만인 645년, 현장은 당으로 많은 경전을 가지고 돌아온다. 현장은 고국에 들어가기 전 당 태종에게 입국을 허가해 달라며 일종의 ‘반성문’을 보내는데, 성공한 해외여행은 처벌하지 않는지 황제는 현장을 환영하며 ‘삼장’(三藏)이라는 법명도 하사 한다. 여기서 알 수 있지만 「서유기」의 삼장법사의 모티브는 이 현장이다. 이 스님은 사회생활도 어찌나 잘하는지 가져온 원문 경전들을 정리하고 번역하는 일보다 「대당서역기」라는 여행기, 다른 말로 1급 스파이 문서를 바로 지어 태종에게 바친다. 태종이 서역에 관심이 많았음을 미리 알았을 터였다. 하기는 예부터 종교인들은 사회생활을 잘해야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리대로 소신 있게 살다가 모시는 신 곁으로 빨리 보내졌던 일은 셀 수가 없다. 현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정리한 경전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서문도 태종에게 써달라고 한다. 형제까지 죽이고 권좌에 오르는 등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살았던 당 태종은 자신에게 면죄부를 바치는 현장이 얼마나 예뻤을까. 환속해서 함께 정치하자는 황제의 권유도 뿌리치고 종교인으로 살겠다는 모습은 더 예뻤을 것이다. 감격한 태종이 번역 사업을 화끈하게 밀어주면서 현장은 평생 숙원이던 불교 한역을 성공하고 이는 후일 신라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현장보다 한 세대 지난 유학파 스님인 의정이 서술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은 현장과 비슷하게 서역과 천축으로 떠났던 승려 61명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스님들이 진리탐구에 대해 열정이 넘쳤구나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인도까지 죽어라 가서 이것저것 바리바리 싣고 왔는데 다른 사람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이 때문인지 그때부터 중국 불교는 법상종, 천태종, 구사종, 화엄종, 선종 등등 종파불교의 시대가 열린다.
현재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거의 모든 이동이 강제 중단된 상황이다. 이런 때에는 다른 곳에 가고 싶어도 잠시 참아보는 게 공동체를 위한 길일 것이다. 그래서 바이킹과 이슬람 인, 중국 스님들을 통해 옛사람들의 여행(?)을 잠시 보여드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유래 없이 우울한 연말연시가 될 수 있지만 이번 기회에 이런저런 책도 읽고 집에서 영상도 보면서 다음 모임 때 할 이야기를 비축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부디 모두 건강 챙기시고 한 해 마무리 잘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