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 나라가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쉬는 날은 언제일까? 독일의 ‘Bureau Oberhaeuser’라는 한 디자인 회사가 이러한 ‘anniversary(기념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2019년 달력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이 달력에 따르면 세계에서 제일 많이 기념하는 날은 새해 첫날이며 236개국이 쉰다. 두 번째는 크리스마스(183개국), 세 번째는 노동절(143개국), 네 번째는 성 금요일(Good Friday, 120개국, 주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기리는 날)이다. 그다음은 독립기념일로써 117개국이 기념하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기념일인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 67개국, 주 : 이슬람력으로 12월 8~10일 행해지는 메카 연례 성지순례(대순례)가 끝나고 열리는 이슬람 최대 명절)와 이드 알 피트르(Eid al-Fitr, 59개국, 주 : 이슬람 문화권에서 금식 기간인 라마단(Ramadan)이 끝나는 날 사원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대한 음식을 장만해 축하하는 축제)는 각각 7위와 9위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 상위 기념일들도 대체로 종교 관련 날이 많은 편이다. 이외에 국경일(national day)을 가진 나라로 41개국이 있다. 그것밖에 없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 국경일에 독립기념일이 빠져서 그렇다. 우리나라는 광복절을 빼고도 삼일절, 개천절, 한글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 41개국에 포함이 된다. 그렇지만 사실 이런 기념일들에 기쁜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연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냐마는 어지러운 곡절을 듣고 나면 마음 편히 쉴 수만은 없는 날들이 종종 있다.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잘 나가던 시기)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일(Armenian Genocide Remembrance Day)은 그런 날이다. 매년 4월 24일이 되면 아르메니아 인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자행된 오스만 튀르크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들, 특히 1915년 벌어진 조직적 학살사건을 기억하며 희생자들을 기린다. 아르메니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지리적으로 나누는 캅카스 산맥 부근에 있는 나라이다. 터키, 이란, 조지아, 아제르바이잔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인종 중 백인(白人)을 의미하는 ‘코카소이드(Caucasoid, 주 : 황인을 몽골로이드, 흑인을 니그로이드, 백인을 코카소이드라고 부르는 18세기 독일 학자 블루멘바흐에 의하여 이론화되었으나, 현재는 거의 폐기되었다)’라는 말이 이 캅카스 지방에서 유래되기도 하였다. 아르메니아는 오랜 시간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하에 있었음에도 기독교적 전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는 로마제국보다 먼저 기독교를 공인하여(AD 301)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오스만 튀르크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밀레트(Millet, 주:종파별로 구성된 일종의 공동체로, 비무슬림 보호민으로서의 일정한 제한과 납세의무를 제외하고는 광범하게 자치가 허용되어 언어 ·종교 ·풍속 ·관습 및 재판권도 인정받고 있었다)’라 불리는 비이슬람교도 자치제도를 폭넓게 허용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이를 활용하여 유대인과 더불어 오스만 제국 내의 상권을 장악하여 많은 부를 축적한다. 현재 아르메니아에 세워져 있는 많은 교회들은 이 시기 아르메니아인들이 모국에 보낸 자본을 토대로 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 다홍색이 아르메니아 밀레트이다
하지만 오스만 튀르크가 18세기 이후 쇠퇴하며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자 상황은 반전된다. 상실된 유럽 영토에 살던 투르크 인들이 생존을 위해 소아시아 지방으로 돌아오고, 유럽 국가들과 전쟁이 이어지자 이들과 같은 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튀르크의 ‘2등 신민’에서 ‘반민족행위자’로 신분이 뒤바뀌었다. 오스만 튀르크가 자랑하던 타 종교, 민족 등에 대한 관용은 국가의 전성기에나 가능했지 이 시기부터는 자기 민족 챙기기에도 급급해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정부와 투르크인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등 제국 내 타민족들에 대하여 박해와 학살이 이어지고 결국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원인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러시아가 투르크의 동부이자 캅카스 남쪽인 비틀리스 지역을 공격하자 투르크의 영웅 케말 아타튀르크가 군대를 이끌고 침범해 온 러시아군을 격파한다.
도시 Van의 모습
이 비틀리스 인근에 ‘반(Van)’이라는 도시가 있었다. 투르크 군은 전투의 연장선에서 반의 아르메니아 청년들을 징집하려 했다. 당시 전투가 이루어지던 지역은 옛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이기도 했다. 모국의 옛 땅이 러시아와 투르크에 양분되어 있었고 아르메니아 인들이 양 측 군대에도 상당수 편입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동족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던 아르메니아 인들이 징집을 거부하자 투르크는 이를 진압하려 했고 물리적 충돌과 학살까지 이어진다. 이 사건은 투르크 전역으로 확대된다. 1915년 4월 24일 아르메니아 종교지도자 250여 명 앙카라로 끌려가 처형당했으며, 제국 내 아르메니아 인들은 시리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가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터키의 정부, 군대, 유럽에서 귀환한 투르크 인들은 아르메니아 인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한다. 이주 과정에서도 식량과 생필품을 제공하지 않아 많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굶어 죽거나 병으로 사망했다. 희생자는 최소 80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으로 추정된다. 아르메니아인들과 함께 오스만 제국 내 소수민족이던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쿠르드족(주 :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에 걸쳐 있는 아리안계 민족이다. 쿠르드족의 전체 규모는 약 3,3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중 1,500만 명 정도가 터키에 거주한다. ‘중동의 집시’로 불렸으며 이 중 이라크계 쿠르드족은 걸프전쟁 이후 미국의 도움으로 자치정부를 건설하였다), 시리아인들도 함께 피해를 입는다. 안타까운 것은 이 학살사건에서 쿠르드족이 그간의 복수를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르메니아인들도 쿠르드 족을 죽이는 피의 악순환이 벌어진 일이다. 지난날 아르메니아인들이 제국의 ‘2등 신민’을 자처하며 쿠르드족들을 핍박했던 결과였다.
프랑스 의회가 아르메니아 학살을 규탄하자 이를 비판하고 있는 터키 시위대
한동안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잊혀져 있었다. 냉전 시기 NATO에서 대(對) 소련 최전선을 담당하던 터키의 심기를 서구 사회가 함부로(?) 건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아르메니아 독립하면서 유럽으로 편입되자 형편은 뒤바뀌게 된다. 아르메니아는 나름 백인 계열의 기독교를 믿는 나라이고 터키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 의회가 2011년 터키의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규탄하기도 했으나 터키는 프랑스가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저지른 학살을 예로 들며 반격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하며 ‘악을 숨기거나 부인하는 것은 상처에 붕대를 감지 않아 계속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자 터키는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가 콩고인을 학살한(최소 천만 사망 추정) 거나 지적하라며 이 발언을 비판하였다. 터키 내에서 의견도 분분하다. 2006년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이 아르메니아 학살을 공론화하며 사죄하지 않는 터키 정부를 비판하자 터키 내 비판 여론과 함께 국가의 정통성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넘겨지기도 하였다. 일부 학자들도 서구 사회가 자신들이 타 지역에서 저지른 학살은 크게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비기독교 국가인 터키가 기독교 국가를 핍박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부각되는 거라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나아가 서구 사회가 변죽만 울리고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의 지난 치부 또한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란 우려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터키지역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
우리도 4·3 사건과 같은 슬픈 사건들이 있다. 이런 비극이 더 마음 아린 것은 오랜 시간 규명되지 않고 묵혀져 있다가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기 바빠 정작 피해자들의 권리구제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행사들이 많이 축소되었으나 마음으로는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4·3과 같았던 세계의 비극적 사건을 돌아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합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