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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Nov 22. 2020

이 땅은 누구의 것인고?

토지공유 사상에 대해서

부동산 문제가 나날이 뜨겁다. 토지는 유한하고 인간의 소유욕은 무한하기에 쉽지 않은 문제이다. 누구나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점까지 생각한다면 해결은 정말 난망하다. 토지에 관한 갈등들은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옛사람들도 땅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민감했다. 다만 사적 소유가 확립되지 않았고, 신분제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토지가 사유재산의 대상이라는 것을 내세우기보다는 토지공유의 사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룻의 모습(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작)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땅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나타난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위기 25장 23절) 유대인들은 신의 인도에 따라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방, 즉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왕국을 건설한다. 그리고 지파별로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어 가진다. 이들은 분배받은 땅을 신이 주신 상속 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손 대대로 이를 물려받았다. 신의 선물은 종족 밖의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대토지를 축적하는 일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했다. 구약성경 『룻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룻과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굶어 죽을 위험에 처한다.  나오미의 남편도 룻의 남편도 사망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기였는데 갑자기 보아즈라는 잘생긴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나 룻과 결혼하며 전 남편들의 재산을 지켜주었다. 보아즈가 전 남편의 먼 친척이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매매'는 안되었지만 우회로로 '임대'는 가능했다. 다만 통상적 토지법 하에서는 땅 한 필지가 팔렸을(임대되었을) 경우, 판(임대한) 사람은 남은 기간의 임대료를 되돌려 주면 언제라도 그 땅을 무를 권리를 가졌다. 판 사람 자신이 그 토지를 무를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렇게 해 줄 수 있다. 위에 살펴본 룻의 이야기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땅의 최장 임대 기간은 50년이지만, 모든 임대 계약은 희년(禧年, the Year of Jubilee), 즉 자유의 해에 만료가 되었다. 아예 히브리어에는 ‘희년’을 뜻하는 ‘요벨’(yobel)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있다.


와트 타일러의 반란


그러나 늘 말은 좋았고 오히려 교회가 앞장서서 대지주로 변해갔다. 세속 기득권자들에게 땅과 돈을 받아서 이들의 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었던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메노파(the Mennonites)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은 지주를 없애고 자급자족적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무력으로 이런 성경적 가르침이 어긋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시도들도 있었다. 1381년 영국에서 벌어진 와트 타일러의 반란(Wat Tyler's Rebellion)이 대표적이다. 반란군은 세금의 삭감과  농노제와 같은 인신 예속적 노동의 철폐, 고위 관리들과 법관들의 제거를 요구했다. 농민들의 반란에 불을 붙인 것은 존 볼(John Ball)이라 불리는 성직자의 설교였다. 그는 “아담이 농사짓고 이브가 길쌈할 때 귀족은 도대체 어디 있었는가?”(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를 외쳤다. 16세기에 벌어진 독일농민전쟁도 사정은 비슷했다. 농민들은 메밍겐 강령 「12조」를 통해 성직자 선출의 자율권, 십일조 철폐, 농노 해방, 산림의 공동이용 등을 요구했다. 그리고 모두 신의 이름으로 주장하고 있음을 명시했다. 토지는 신들이 부여한 자신들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지도자는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1489~1525). 젊은 신부였다.


꾸란의 모습, 좋은 말씀은 많다


이슬람교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들은 꾸란(Quran)을 통하여 토지공유 사상과 상속받은 재산 외의 것의 소유를 금지한다. “실로 대지가 알라의 것이니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종들에게 그것을 상속하시느니라.”(꾸란 7장 128절) 지배자들이 개종하여 종교를 퍼뜨렸던 그리스도교와 달리 이슬람교는 소수부족의 신앙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통하여 신앙과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무슬림과 비무슬림,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이분법적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처음에는 토지 소유를 이슬람교도들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협상을 통해 합병되는 타민족들도 생기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비무슬림들에게도 토지 소유를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세금을 부과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땅은 알라의 것이었기에 원칙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세금은 물릴 수 없었다. 하지만 돈은 늘 필요했기에 우회적으로 우슈르(ushr)라는 십일조를 납부하게 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가 소유한 토지를 우슈리(ushri) 토지라고 부르게 된다. 이에 반해 비무슬림들은 자기가 가진 토지에 대한 세금과 인두세도 물어야 했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무슬림이 되어 우슈르만 내겠다고 주장하자 재정 악화를 우려한 이슬람 정부(우마이야 왕조)는 타민족의 개종을 한동안 금지하는 아이러니한 일도 벌어졌다. 여기는 아예 땅 때문에 나라가 기울기도 했다. 강대국 오스만 튀르크가 쇠퇴한 이유 중 하나가 토지를 놓고 벌어진 시파히(지주 귀족 계급)와 예니체리(국왕 친위대)들 간의 갈등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슬람교에서는 공공의 이익을 통한 사회적 효용을 뜻하는 ‘마슬라하’(maslaha)란 개념이 있었다. 페르시아인 알 가잘리(Algazel)에 의해 제창된 마슬라하는 시장에서 윤리적으로 행동할 것을 강조하며 생필품의 생산과 공급을 강제적 의무로, 화폐를 쌓아두는 것을 비난하고, 협동은 칭송했다. 고리대를 거부하고 정의, 평화, 안정성이 경제적 진보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물론 잘 지켜지지는 않다.



동학농민군의 반란, 왕토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 사회에 비해 중앙집권이 발달했던 동아시아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신의 이름으로 토지의 소유권을 정의했던 서구와 달리 동아시아는 국왕의 존재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시경』 소아편(小雅篇) 북산(北山)에 나오는 “천하의 토지는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고, 천하의 신하는 왕의 신하가 아닌 것이 없다”(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구절은 모든 것이 국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을 보여준다. 유교사회에서 왕은 사인(私人)이지만 사회 공공성의 장치이기도 했다.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왕은 공정한 토지의 분배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 못한 왕의 실정은 봉기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은 「무장포고문」에서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일지라도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이 주시는 옷을 입고 사는 자들이다. 어찌 국가의 위망을 앉아서 보겠는가”라고 외쳤다. 이는 부패한 기득권에게 대항하려는 자신들의 행위가 왕토사상에 따르면 정당하다는 뜻이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동학농민군과 위에서 언급한 유럽 농민반란군 모두 자신들의 행동 근거를 진보적인 사상이 아닌 기존의 사상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토지공유사상이라고 해서 꼭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남아시아 토지제도를 연구한 제임스 스콧이 지적한 대로 사회가 나름의 안정을 제공하는 한 종래의 규범을 통해 부당함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가 한국의 반정부 시위에 종종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예이다.


마을 간의 석전, 계투는 훨씬 심각하게 싸웠다


중국의 경우 기본적으로 국토는 천자, 즉 국가의 소유였다. 그러나 워낙 땅이 넓었던 관계로 개간한 땅의 소유권은 암묵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다만 황무지를 갈아엎는 일은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기에 마을이나 종족의 공동 소유지로 여겨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 개척지를 놓고 벌어지는 종족 간의 반복이었다. 이 갈등은 때로는 계투(械鬪)라 불리는 무장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언월도는 물론이고 종종 대포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나라는 넓고 사람은 많고 싸움은 허구한 날 벌어졌던지라 정부는 전투 결과만 보고받고 너무 심하다 싶으면 화해시키는 시늉 정도만 했다. 그런 것을 보면 무협 소설에 나오는 ‘관과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아예 근거가 없는 구절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베트남의 전통가옥


비슷한 것이 베트남에도 존재했다. 베트남에는 “대나무 울타리 안(촌락)에는 황제의 권력도 미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여기의 촌락은 국가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매우 자율적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다만 이런 공전(公田)의 형태는 19세기부터 편입된 남부 베트남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남부의 새로운 땅은 사전(私田)으로 인정되었고 남부와 북부의 땅에 대한 의식 차이를 낳게 했다. 이런 소유권 인식의 상이함은 훗날 베트남 전쟁의 한 원인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짧게나마 세계 곳곳의 토지 인식을 살펴보았다. 공통점은 토지공유 사상이 행동의 명분으로 활용될 때는 일반적으로 생존권과 관련되어 있을 때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 사회가 부동산으로 들끓는 것은 살기 힘든 현실의 반증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부디 언젠가는 모두에게 행복한 집이 생기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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