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관람가기 전 잠시만 읽어보세요
박물관에서 일한다고 하면 이런저런 질문을 종종 받는다. 물론 심각한 내용은 아니다.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의사나 변호사들은 사람의 생사가 달린 물음을 받을 때도 있겠지만 학예사는 그런 거 없다. 보통 ‘나 이만큼이나 알고 있다? 잘 알지?’ 같은 부류나 ‘네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보겠다!!’와 같은 질문을 주로 받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잘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틀린 답변을 했을 때 찾아올 부끄러움을 견디기도 어려워서도 그렇다. 한 마디로 무식이 탄로 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예전 한 지역 방송과 인터뷰를 했었다. 촬영 시간이 너무 길어져 시쳇말로 ‘정신줄을 놓고’ 아무 말이나 해댔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실과 맞지 않았던 대답을 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덕분에 며칠간 잠을 설쳤다. 그 얘기가 방송에 나가면 나는 항의 전화를 수십 통 받겠지라고 혼자 떨었지만 아무 반응 없었다. 내가 나온 줄 아무도 몰랐다. 그저 양가 부모님과 아내만 몇 번을 돌려보며 좋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나는 아주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조금 어린 친구들이 물어볼 때 그간 마음이 편했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았더니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박물관이 뭐예요?” “..... 어?.... 음.... 내 월급 주는 곳인가?”
박물관을 영어로 하면 ‘museum’이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무세이온(museion)’이다. 뜻은 예술과 학문의 여신들인 뮤즈(Muse,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9명의 여신을 가리킨다.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역사, 희극, 서정시, 찬가, 연극, 서사시, 음악, 천문, 비극 등을 관장한다)의 집, 신전 이런 의미이다. 그리스어 원어로 읽으면 ‘무사(Mousa)’, 복수형은 ‘무사이(Mousai)’ 라고 읽어야 하는데, 제주어로 잘못 읽으면 질문의 여신(제주는 왜? 라는 말을 무사? 라고 한다)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기에 여기서는 뮤즈라고 표기하겠다. 뮤즈는 문학이나 역사, 음악 등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기에는 3명 정도로 적었다고 하는데 학문이 발전하면서 각자의 영역이 점차 분화되어서인지 제정 로마 시대에 가서는 9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들이 담당했던 갖가지 정보가 모인 곳이 박물관의 시작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정리하자면 무세이온은 지금의 박물관처럼 예전 유물 등을 감상하는 곳이 아닌 지식을 모아 놓는 장소라는 개념에 더 가까울 것이다. ‘대학 + 도서관 + 박물관’ 이 정도로 보면 될 듯하다. 물론 무세이온에서 공연예술이 진행될 때면 진귀한 보물들이 함께 진열됐다고 한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후에는 다시 창고에 보관되었고 외부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인지 「박물관의 탄생」의 저자 전진성은 무세이온(museion)을 ‘보물들의 무덤’이라고 하며 유명한 사람의 묘라는 뜻의 ‘마우솔레움(Mausoleum)’과 비교하기도 한다.
고대 시대에 가장 유명한 무세이온은 헬레니즘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BC 30, 헬레니즘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분열되고 그의 제국은 분열된다. 알렉산드로스의 수하 장수들에 의해 영토가 나누어지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 차지하고 왕조를 세운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의 원전으로 알려진 ‘70인역’이 이 왕조의 후원으로 번역되었으며, 잘 알려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에서 세운 ‘무세이온 알렉산드리아(Museion of Alexandria)’이다. 흔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도서관은 무세이온의 부속건물의 하나였으며, 무세이온 알렉산드리아의 몰락에는 여러 가지 설(이교도의 사상이 담겼다며 극단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태웠다고도 한다)이 있지만 여러 차례의 전쟁과 화재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고 한다.
이후 중세 유럽에서는 각 수도원들이 박물관의 역할을 담당했고 르네상스 시기에는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등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학문을 후원하기 위해 박물관을 만들기도 했다. 이후 근대 시기에는 전제 왕권의 후원을 받은 대형 박물관 등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등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가 개막하면서 각국의 박물관이 자국의 유물보다는 약탈한 물건으로 박물관을 채우기 시작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박물관들이 위의 세 박물관이다. 특히 대영박물관은 혹자들이 ‘장물 창고’로 비아냥거릴 만큼 약탈한 물건들이 넘쳐난다. 예를 들어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의 흔적을 보려면 카이로가 아닌 런던을 가야 한다. 이라크나 시리아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제국주의를 지탱한 이념 중 하나는 ‘사회진화론’(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주장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등장하였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이념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적자생존’의 개념을 사용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이다)이다. 이것이 박물관에도 영향을 미쳐, ‘열등한 국가와 민족은 인류의 유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미명 하에 괜찮은 물건을 보는 족족 배에 실어서 자기들 집으로 보내 전시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박물관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어원부터 따져봐야 한다. ‘박물관(博物館)’이라는 단어는 1860년 즈음에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동아시아에서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는 ‘고(庫)’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동북아에서 문호 개방이 가장 빨랐던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서구의 여러 개념들을 번역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들을 만든다(대표적인 학자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교육가이며 게이오 대학의 설립자이다. 1만엔 지폐에 실린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민주(民主)’, ‘자유(自由)’, ‘주권(主權)’, ‘연애(戀愛)’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게 단어를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래 있던 문자에 새로운 개념을 부여하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박물관은 전자로 볼 수 있다. 원래 ‘박물(博物)’이라는 단어는 중국에 존재하고 있었다. ‘박물지(博物志,삼국시대 위나라 장화(232~300)가 펴낸 일종의 백과사전)’, ‘박물군자(博物君子,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자성어. 춘추좌전(春秋左傳)에서 유래되었다)’ 등에 원래 쓰였던 말을 ‘museum’에 대응시키고자 ‘관(館)’자를 붙여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박물관이라는 단어를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19세기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 「서양 사정(西洋事情,후쿠자와 유키치가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서양에 대해 소개한 책)」에 사용하여 이제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한국도 박물관이 생겨났다. 1909년에 창경궁 자리에 세워진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과 1915년 경복궁 자리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그것이다. 이곳들은 일본이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활용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손상되기 쉬웠던 유물을 한데 모아둠으로써 국립중앙박물관이 탄생하는데 의도치 않은 기여를 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 유물은 30만여 점이 넘으며 세계 6위 규모이다. 참고로 제주교육박물관은 3만 점 정도 있다(나름 열심히 모아놨다). 질적으로 비교하지는 않겠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 박물관을 오면 놀란다고 한다. 훔쳐 오지도 않았는데 유물들이 이렇게 많으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땅을 파면 많이 나오고 있으니 박물관이나 박물관들의 수장고는 더 늘어날 예정이다. 다만 생각해 보건대 박물관을 볼 때는 너무 양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잘못하면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기 위해 타국을 무차별 약탈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그렇다. 아무튼 박물관은 옛사람들과 대화하며 생각하기 좋은 곳이다. 이제 곧 겨울이 올 텐데 따뜻한 주변에 가까운 박물관을 찾아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시간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