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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Feb 25. 2019

알라딘

지니에게 소원을

대학원 시절에 외국인 교수의 조교를 한 적이 있다. 그분이 진행하는 유학생 대상 수업도 함께 들어갔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영어를 굉장히 잘할 것 같지만, 나는 “I’m fine, thank you, and you?”만 입에 붙어있는 제도권 교육에 충실했던 한낱 보통의 학생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은 조교에게, 즉 나에게 수업 관련 질문을 하기 위하여 달려왔다. 나는 그 친구들 말을, 그 친구들은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아쉬운 건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내 주어, 동사가 하나도 맞지 않는 영어를 잘도 들어주었다. 문제는 교수님과의 소통이었다. 유창한 자기 나라말로 하면 서로 못 알아들었기에, 한국 사람은 어설픈 영어로, 미국 사람은 어설픈 한국어로 상당히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며 대화를 나눴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나에게 ‘영어 실력 좋아졌겠다’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개항기를 전공하고 있던 나는 ‘양이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민족의 정신을 파는 것이다’라며 위정척사 정신을 강조하며 면피(?) 하곤 했다. 결국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은 교수님의 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별일 없이 살고 있지만 가끔 외국인 손님들이 오면 곤란해진다. 더군다나 본청에서 외국인 시찰단이라도 온다고 하는 날에는 아무리 통역이 붙어 있어도 등에 땀이 난다. 내 하찮은 영어 실력이 들킬까 봐 그렇다. 학창 시절부터 길게 이어온 영어에 대한 부채의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기사를 하나 읽게 되었다. 북한 외교관들은 영화 대본을 통으로 외우는 영어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그 방법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영어 공부할 영화를 고른다는 명분으로 며칠을 모니터만 보며 지냈다. 아내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하도 쳐다보길래 그때 보고 있던 영상을 가리키며 이걸로 공부할 거라고 변명했다. 화면에는 알라딘이 양탄자를 타고 재스민 공주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알라딘(aladin, Alāʼ ad-Dīn, علاء الدين)은 ‘신앙의 고결함(nobliity of faith)이라는 의미이다. 원래는 알라 앗 딘이라고 읽는데 축약해서 알라딘으로 읽는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 나오는 살라딘을 원래 ’ 살라흐 앗 딘‘ 이렇게 읽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배경은 아랍의 한 나라이지만 원전의 알라딘은 중국 소년이다. 홀어머니와 사는 알라딘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형으로 위장한 마법사에 꾐에 빠져 고생하다가 지니(램프의 정령)도 만나고 공주도 만나고 해서 잘 살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사실 알라딘 이야기의 주 무대는 마그레브(Maghreb, 북서 아프리카) 지방이다. 왕도 계속해서 황제가 아닌 술탄으로 부르고 불교도 유교도 나오지 않으며 나오는 사람들은 온통 무슬림과 유대인뿐이다. 그러니 주인공의 출신 지역만 중국에서 빌려온 셈이다. 그래서 알라딘 이야기가 생긴 곳이 중동과 중국 문화가 교차하는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쯤이 아닐까 하는 주장도 있다.



앙투안 갈랑


원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알라딘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라비안나이트(Arabian Nights)」 혹은 「천일야화(One Thousand and One Nights)」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천일야화」의 원전이 되는 이야기들에 알라딘은 등장하지 않는다. 보통 「천일야화」의 기본 뼈대는 10세기경 페르시아(현재의 이란 지방) 설화를 아랍어로 번역한 「천 개의 이야기(Hezār Afsān, Thousand Stories)」로 생각된다. 페르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설화 문학이 발달한다.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라고도 한다, 세상이 선과 악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이란 전통 종교)를 섬기는데 이 종교에는 「덴카르트(Dēnkart)」라고 불리는 설화만을 모은 경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의 이슬람 왕조들의 지배를 받게 되자 페르시아의 설화문학들이 아랍으로 흘러 들어가 이야기책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 책들과 나머지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프랑스 출신의 학자 ‘앙투안 갈랑’(Antoine Galland, 1646~1715)이 1704년 처음 번역할 때 알라딘의 이야기가 함께 들어가게 된다. 앙투안 갈랑은 성적인 이야기 등을 배제하고 상당히 건전하게 번역을 했는데, 영국인 ‘리처드 버턴’(Richard Burton, 1821~1890)은 이에 불만을 갖고 아랍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완역한다. 그래서 버턴의 이야기들은 성(性) 적이거나 잔혹한 장면들도 자주 등장한다. 아무튼 아이들과 함께 알라딘을 읽고 싶다면 앙투안 갈랑의 판(열린책들)을, 어른들끼리 알라딘을 보려면 리처드 버턴의 판(범우사)를 보면 될 듯하다. 말이 길어졌지만 아무튼 알라딘은 「천일야화」의 원전들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1811년 런던에서 출판된 천일야화


그래도 수많은 알라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디즈니의 「알라딘」이니 그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그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은 술탄, 재상 자파(Jafar), 지니(Genie) 등이 있다.  


술탄(sulṭān)은 아랍어로 ‘권력’을 뜻하는 말이다. 추상명사였던 이 말은 각지의 정치 지도자들이 지역의 맹주를 자칭하며 ‘왕’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술탄보다 위 서열은 칼리프(khalifa)로서 종교 지도자이고, 아래 서열은 아미르(amīr)로서 군사 지도자 정도로 사용된다. 「알라딘」에 등장하는 술탄이 누구를 모델로 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약간 무기력하기도 하고 남의 말에 잘 속기도 하지만 결말 부분에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그런 디즈니의 전형적인 왕이다. 다만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왕은 하룬 알 라시드(Hārūn ar-Rashīd, 766~809)이다. 그냥 「천일야화」에 왕이 등장한다 싶으면 하룬 알 라시드를 찍으면 된다. 그러면 웬만하면 다 맞는다. 하룬 알 라시드는 이슬람 압바스 왕조(750~1258)의 5대 칼리프이다. 압바스 왕조 하면 생소할 수 있겠지만 탈라스 전투(751)에서 고구려인 고선지가 이끄는 당 군과 맞붙은 이슬람 군이 압바스 왕조의 군대이다. 하룬 알 라시드는 이 압바스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였고, 각종 문학과 과학, 예술이 모두 전성기를 맞는다. 종종 이슬람이 관용의 종교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시기만큼은 그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타 종교, 타민족을 차별하지 않았고 법률제도 또한 발달한다. 한창 게르만족의 놀이터였던 중세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 이슬람 학자들이 열심히 번역을 해준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룬 알 라시드의 사후 아들들끼리 내전과 수니파, 시아파 간의 갈등이 불거지며 압바스 왕조는 쇠락기를 맞는다.

하룬 알 라시드


자파의 이름은 아마 하룬 알 라시드 시대의 재상 자파르 야히야(ja`far bin yaḥyā, 767~803)에서 따온 듯싶다. 「알라딘」에서 자파는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악당이지만 자파르는 하룬 알 라시드 치세에서 문화의 중흥을 이끈 정치가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특이하게 불교를 믿었던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제지공(製紙工)들이 포로가 되어 아랍지역에 종이 만드는 기술이 전해진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종이공장을 압바스 왕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세운 사람이 바로 자파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하룬 알 라시드의 여동생 아바사와의 통정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다. 그의 가문인 바르마크 가는 압바스 왕조의 세도 가문이었는데 자파르의 처형과 함께 일족이 몰살당하며 사라지게 되는 비극을 맞는다. 아마 바르마크 가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하룬 알 라시드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숙청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천일야화」에는 하룬 알 라시드와 자파르의 콤비가 자주 나오는데, 저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늘 씁쓸하게 이야기를 읽게 된다. ‘언젠가 왕이 재상의 목을 치겠지...’ 하면서 말이다. 「알라딘」의 속편 「알라딘 2」 에는 술탄이 결국 자파를 처형하게 되는데 어떤 면에서는 고증에 잘 들어맞는다고도 하겠다.


「알라딘」에는 지니가 한 명 나오지만 사실 「천일야화」에는 두 명 나온다. 램프의 정령과 반지의 정령이다. 둘 중 램프의 정령이 더 세다. 반지의 정령은 좀 약하다. 이야기 중에 반지의 정령이 말하기를 “램프의 정령이 해 논 걸 자기는 손댈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보통 지니는 책에서 요정, 정령, 마신(魔神) 등으로 번역하고는 한다. 이유는 지니라는 말이 천사와 악마를 제외한 모든 영적 존재를 가리키고 있어서 그렇다. 우리나라 말로 ‘도깨비’ 같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지니의 원래 이름은 ‘진(Djinn)’으로 아랍지역에서 숭배되는 신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등장하면서 알라를 제외한 다른 애니미즘 적 개념들은 모두 그 영적 지위가 격하되게 된다. 그나마 지니는 악마 취급을 받지 않은 게 다행일 것이다. 물론 악하고 못된 지니도 있긴 하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천일야화」에 지니가 등장하면 ‘알라는 위대하고~’ 혹은 ‘알라는 유일하고~’와 같은 자기 검열적, 시쳇말로 ‘웃픈’ 행동을 자주 하곤 한다. 이건 약간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위에 언급한 램프와 반지 정령의 서열과 같은 이야기가 우리나라 야사에도 있다. 병자호란(1636) 때 강화도를 지키던 김경징(1589~1637)은 육갑(六甲) 술법으로 신장(神將)을 잘 부렸다고 한다. 그래서 청군이 조선으로 쳐들어오는데도 신장을 믿고 매일 술만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청군이 강화에 들이닥쳐 신장을 호출하니 막상 신장이 하는 말이 “나는 명나라 신장이라 청군에 약하다”라며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강화도는 함락되고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포로가 되고 만다. 아무튼 여기서 ‘병신 육갑한다’는 말이 나왔다는 전설도 있다.  

앨런 멩컨


역사 이야기는 이쯤 하고 가벼운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알라딘」 만큼 유명한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가 「A Whole New World」일 것이다. 남녀가 함께 부르는 사랑 노래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고 유부남의 가슴도 살살 뛰게 하는 그런 노래이다. 버전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애니메이션 삽입곡, OST 버전, 브로드웨이 뮤지컬 넘버 등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애니메이션에 삽입된 곡이 제일 낫지 않나 싶다. OST는 좀 느끼하고 부담스러우며, 브로드웨이 것은 굉장히 비즈니스적인 느낌이 있다. 애니메이션 버전의 목소리는 필리핀 출신 레아 살롱가(Lea Salonga)라는 사람이다. 이 분은 미스 사이공 초연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분이다. 종종 결혼식에 갔을 때 이 노래를 축가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직까지 성공한 사례는 보지 못했다. 그냥 둘만의 첫날밤에 틀어놓으면 더 로맨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A Whole New World」는 1992년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 그래미 올해의 노래상 등을 휩쓸었다. 앨런 멩컨(Alan Menken)이라는 작곡가가 「A Whole New World」를 작곡했는데 이 분은 이외에도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포카혼타스 등의 OST도 작업했다. 생긴 것도 굉장히 부드럽게 생기신 분이다. 직장생활이 힘들어질 때쯤이면 저작권료가 얼마인지도 가끔 궁금하다. 나중에 아이에게 피아노를 한번 열심히 쳐보라고 해야겠다. 그냥 덧붙이는 곁가지 하나만 더 하자. 조금 시간이 지난 디즈니 노래들을 감상할 때 멜로디 위주의 노래가 흐르면 앨런 멩컨이 썼다고 생각하면 되고, 리듬이 강조되는 웅장한 곡(라이언 킹의 ‘Circle of Life’와 같은)은 ‘한스 짐머’(Hans Zimmer)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지간하면 들어맞는다.


영어 공부 얘기하다가 알라딘으로 흘렀는데, 그건 내가 「알라딘」을 보다 보니 지니에게 소원을 하나 빌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지니야, 제발 영어 좀 잘하게 해 줘”. 이건 반지의 정령이라도 충분히 들어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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