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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할머니는 '작은 말꾸'를 사랑해

두 여자의 집

30대 딸과 60대 엄마의 아옹다옹 일상 돋보기


 내가 다니고 있는 신문사는 5년 이상 쉬지 않고 일하면 15일의 안식 휴가를 준다. 직원 복지 차원에서 만든 제도인데, 나는 요즘 그 휴가를 즐기고 있다. 원래는 장기 여행을 가려고 아껴두고 있었는데 별안간 바람이 불었다. 쓰고 있는 책 작업을 마무리하겠다는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지만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 일에 많이 지쳐있었다. 나는 기자로서 단점이 참 많지만, 그래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같이 답을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게 기자로서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 조금 힘들었다. 나라는 그릇에는 이미 너무 많은 물건들이 쌓여있어 이것을 덜어내기 전에는 다시 기능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연휴가 많은 5월이라 휴가를 붙여 쓰다 보니 약 3주의 시간이 생겼다. (너무 좋다. 행복하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원고 작업을 하고 저녁이면 근처에 사는 오빠 집에 가서 조카 원이를 엄마랑 함께 보기로 했다. 최근 오빠가 주재원으로 해외에 나가게 됐고, 둘째를 임신한 채 혼자 조카랑 지내는 새언니가 마음 쓰였는데, 원이도 볼 겸, 언니가 회사간 사이에 엄마도 볼 겸 가족들과 함께 하기로 약속을 했다. 

 원이의 탄생은 식구가 적은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엄마는 직장 다니는 아들 며느리를 대신해 원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시간부터 언니 오빠가 퇴근할 때까지 매일 4~5시간씩 조카를 돌본다. 엄마가 오가기 힘들지 않도록 오빠 집 가까이로 이사도 했다. 물론 엄마와 함께 사는 나도 함께 이사 왔다. 식구가 하나 늘자 우주 최강 딸바보가 된 오빠는 말할 것도 없고 나나 엄마도 원이 이야기에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원이 덕분에 엄마의 관심이 분산된 것은 내게도 반가운 일이다. 

 31개월 전에 태어난 오빠의 딸은 요즘 하는 짓이 참 예쁘다. 재잘재잘 유치원에서 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배시시 웃을 때면 이곳이 천국이고 너는 천사이구나 싶다. 첫 딸은 아빠를 닮는다더니 그래서인지 원이는 나를 닮았다. 물론 나보다 훨씬 더 예쁘지만, 아무튼 나를 닮아서... 더 예뻐 보인다. (읭) 

 원이네 가는 날이 늘어나면서 엄마의 새로운 모습도 많이 보고 있다. 내가 혼자 애기 보는 엄마를 돕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육아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엄마(새 언니)가 보고 싶다고 징징대는 원이를 달래는 건 늘 할머니(우리 엄마)다. 10kg을 넘는 원이는 65살의 할머니에게 목마를 태워달라고 조르고, 엄마는 힘들어하면서도 원이를 목에 걸고 집안을 뱅글뱅글 돈다. 더 튼튼한 고모 말을 타보라고 등을 보이며 사정을 해보지만 원이는 “할머니가 해줘”라며 할머니만 찾는다. “야, 우리 엄마도 힘들어. 고모 말 타라고!”라고 말해보지만 애가 이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기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는 원이를 품에 안고 달래는 것도, 밥을 잘 안 먹는 원이에게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고 귀여운 척을 해야 하는 것도 할머니 몫이다. 평소에 밤 8시가 지나서야 집에 돌아오는 엄마가 너무 피곤하다며 그대로 잠들 때면 뭐가 그렇게 힘든가 했는데 그럴 만했다고 이제야 깨달았다.  

 “엄마, 오빠랑 나도 이렇게 키웠어?”

 “몰라, 30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안 나.”

 “안 힘들어? 그래도 아들 딸보다 손녀가 좋긴 좋은 가봐?”

 “그건 맞아. 애 보는 게 쉽지 않은데 그래도 내 손녀니까 다 예뻐 보이는 거지. 근데 얘가 하는 짓이 얼마나 웃기는지 아냐. 이제 다 컸어. (중략)”

 원이 흉을 보는 것 같다가도 결국은 원이 자랑으로 끝난다. 

 “작은 말꾸 어딨나. 여기 있네. 큰 말꾸는 어딨나. 외국에 있지. 우리 원이 언제 이렇게 컸지?”

 “할머니, 까르르까르르”

 원이가 오늘도 할머니 장난에 자지러지며 웃는다. 원이는 새언니가 자신을 작은 말(썽)꾸(러기), 오빠는 큰 말(썽)꾸(러기)라고 부른다고 알려줬다. 작은 말꾸의 가벼운 웃음소리에 할머니도 크게 웃는다. 엄마가 웃는 걸 보니 나도 행복해진다. 

 원이는 올여름이면 세상에 나올 둘째 조카와 엄마와 함께 오빠가 있는 외국으로 떠난다. 초등학교에 갈 때나 한국에 돌아올 텐데 원이는 할머니랑 함께 논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할 수 있을까.  

 오빠가 출국하기 전 날 다섯 식구가 같이 식사를 했다. 식당을 나오다가 우연히 캘리그래피 액자 만들기 이벤트에 참여하게 됐다. 캘리그래피 작가는 원하는 문구를 써준다고 했다. 나는 어떤 문구를 써달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언젠가 원이에게 할머니가 너를 키워준 시절을 설명하기 위한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엄마, 원이 나중에 커서 엄마한테 생떼 부리면 이 액자 보여줘. 사진도 보여주면서 엄마가 너 어릴 때 힘들게 키웠다고 알려줘야지."

 "하하. 그래야겠네."

 엄마가 액자를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리고 집에 있는 원이 사진 옆에 잘 모셔두었다. 원이가 할머니를 영원히 사랑하고 또 사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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