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책빵에서 쓴 글
우리 반 반장이었던 아이가 중간고사 준비 중이라면서 사진을 보내왔다. 나와 함께 공부했던 노션을 대학생이 된 후 꽤 잘 활용하고 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자고로 공부한 내용은 쉬이 잊히지만 공부한 방법은 오래가는 법이다.
대학 때까지 매 학기마다 시험이라는 눈앞의 산을 하나씩 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난다. 매번 결승선에 무사히 다다를 때까지, 한계를 시험하는 긴장과 노력이 필요했고 마음속엔 언제나 작은 휴식을 바랐다. 이 글은 중간고사가 끝났을 무렵에 읽을 만한 휴식 같은 글이길 바란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날씨가 참 좋다, 너무 따뜻하다"라고 말하다가도, "비가 좀 와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연일 계속된 여름 해가 산불을 일으키고, 커뮤네에서 물 절약 메시지까지 받을 만큼 기후에 예민했던 여름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기다리던 청명한 날 속에서도 우리는 비가 내리지 않음을 함께 걱정했다.
말은 현실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해는 숨었고, 며칠 동안 억수 같은 비가 내렸다. 이제는 홍수를 걱정하는 뉴스가 나왔다. 나는 전날 말려둔 여름 장화와 비옷을 챙겼다. 두 딸이 등교하는 모습은 어릴 적 그림책에서나 보던 모습이다. 장화를 신고 비옷을 입고 가방에 방수 커버까지 씌운 두 아이가 집을 나선다. 우산도 없이.
비 오는 날, 모든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와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노르웨이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신체적 활동을 중요하게 여긴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되면 종이 칠 때까지 밖에서 놀아야 한다. 운동장에 나온 아이들의 표정은 참 다양하다. 비를 즐기는 아이도 있고, 귀찮아하는 아이도 있다.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비를 마셔보려고 하는 아이들도 있고, 물 웅덩이를 신나게 첨벙 대며 뛰는 아이들도 있다. 건물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모아 소꿉놀이도 한다. 고학년 아이들은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건물 처마를 따라 거닐기도 한다.
노르웨이에서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우산 없이 걷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한국과 사뭇 다른 문화다. 한국에 갔을 때 노르웨이에서 입던 비옷을 입고 밖에 나가려고 하면 엄마는 꼭 우산을 챙겨줬다. "우산 챙겨가야지." 비를 맞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다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어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거나 부끄러운 감정을 유발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아이들과 비옷만 입고 산책을 했다. 나에겐 일종의 시선 극복 연습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내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난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내 모습이 겁쟁이 같았다. 위험하거나 무례한 일이 아닌데도, 단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주저했다. 내가 다시 20살의 나와 마주할 수 있다면 타인의 시선이나 문화적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선택하고 행동하라고 말하고 싶다.
주변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내 방식대로 걸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람이 불어도 우산이 뒤집힐 걱정 없는 비옷처럼, 자유롭고 당당하게 도전하는 용기를 나에게 덮어 씌우자.
프롤로그 - 인생 부도
1. See Far! (멀리 보라!)
2. 에지를 주는 법 (How to Sharpen Your Edge)
3. 선생님, 저 자퇴할래요. (Teacher, I Want to Drop Out)
4. 아숙업 말고 너 (Not Askup, But You)
5. 자기 검열관과의 대화 (A Conversation with My Inner Critic)
6. 우산을 쓰지 않는 용기 (The Courage to Not Use an Umbrella)
7. 북유럽에 해가 뜬다는 것은 (When the Sun Rises in Northern Europe)
8. 빈둥거림을 취미로 하려고 (Making Idleness a Hobby)
9. 얘들아, 세상은 말이야 (Kids, Let Me Tell You About Life)
10. 텐트 밖은 노르웨이 (Outside the Tent in Norway)
에필로그 - 디폴트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