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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박 Feb 10. 2022

내 시가 신춘문예 본심 최종 2인에 오르다.

그리고, 최종 2인에서 떨어진 기념 소감이랄까.

노르웨이는 낮에도 조용하고, 새벽에 더 조용하고, 깨끗한 서정시를 쓰기엔 너무 좋은.

재작년 어느 겨울밤.

여기 살면서 하고 싶어 진 게 없어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부터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매주 문학비평가시자 시인인 전기철 교수님께 시를 한 두 편씩 보내고, 혹독한 비평을 받은 지 일 년째.

이상문학상과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하시고 수많은 시집을 내신 전기철 시인님.

교수님 시집 한편만으로도 내가 쓴 모든 시가 절망스러웠던 날들을 지나,

비평을 듣는 귀도 뻔뻔해져서 교수님 말씀을 자주 가볍게 무시하고 써 갈기던 가을을 지나,

한 문장의 칭찬에 하루 종일 기분 좋아 휘파람을 깡패처럼 불던 겨울이 왔을 무렵,

생애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해봤다.

서정시를 쓰고 싶었으나, 시도 시대의 경향을 타는지라 서정에 모던을 더해, 모던에 난해를 더해, 거기서 서정을 포기할 수 없어 화두를 집어 놓고 서정으로 덮었다.


코로나에 걸려 몇 주간의 격리.

익숙한 집안의 풍경 속에, 목구멍서 수탉들이 죽어가는 칼 없는 전투를 벌이는 사이,

길 위의 얼음이 녹고 있었고, 문득 잊고 있었던 발표날이 지났길래 쓰윽 들어갔다, 등단작을 구경하러.

등단작은 허를 찌르는 표현과 유연한 시어에 역시 등단할만하네... 심사평까지 읽어 내려오는데

헉, 심사평에 내가 쓴 시 문구들이, 내 시 제목이 보였다. 본심에 16명, 최종 2인까지 내 시들이 올라갔다는 문구만 돋보기처럼 커져서 딱 보이는 거다.

깜놀, 손떨림 증상 지속, 코로나 도지는 줄. 밑에 심사평중 <락다운>과< 문>은 내 작품이다


                                        [2022년 신춘문예 심사평]  


  메타버스 metaverse 시대의 특징적인 상상력이 글쓰기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현실계와 가상계의 경계 지점에서 머뭇거리는 예비 시인들의 목소리가 지치지 않고 끝없이 들려온다. 이처럼 중심을 포착하기 어려운 시대에 ‘시 쓰기/읽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현실계에 구멍을 뚫지 않고는 가상계 혹은 상징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구멍은 통로이며, 구멍 뚫기는 시인의 몫이다. 더불어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소통의 단위가 되기 위해서는 화살촉과 같은 무게중심을 가지고 대상을 향해 꽂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무기명으로 본심에 전송된 원고는 16명의 투고작이었다. 먼저 이를 출력하여 두 사람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읽었고, 다음에는 오프라인으로 모여 당선작을 결정하였다. 대상작은 8명, 4명, 2명의 순서로 좁혀져 갔다. 전체적인 면에서 시적 표현의 양상이나 제재의 다양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시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요건인 서정적 자아의 부재, 주제 의식의 빈곤, 시어의 함축성보다는 진술적 설명에 치우친 점 등이 우선 지적되었다. 최종에서 논의된 작품은 「크레인의 목적」 외 7편, 「손, 라이프 나이프」 외 8편, 「문」 외 4편, 「윤곽」 외 4편이었다.

(... 중간 생략 )

끝까지 남은 작품은 「문」(「락다운」)과 「윤곽」(「사과를 먹는 사과씨들」)이었다. 「문」에서는 “눈송이마다 저녁이 붙어 있다.”와 같은 표현이나, “마당은 자꾸 넓어져서 너는 저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나는 오두막에 들어앉아 폭삭 늙을 때까지 시를 쓰고, 지나가는 새소리를 모으기도 했다.”와 같은 절묘한 서정성의 실현이 시의 정감을 풍부하게 한다. 동시에 내면의 영역 표시를 ‘문’으로 상징한 것은 평이하지만, 역설적으로 ‘문이 없었’ 던 것에 닿아 있다. 평이한 진술 속에서 의미를 형상화해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윤곽」은 앞의 시와 같이 ‘나/너(당신)’의 관계성 속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결속의 상징은 “손”이자, 손이라는 윤곽을 가진 “열쇠”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당신”의 관계성을 깨고 타인의 “손”이 개입되는바,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와 같이, 너(당신)조차도 타자화되면서 꽉 쥔 열쇠의 윤곽은 점차 “헐거워”진다.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해졌다”라고 했을 때, 선택 불능의 홈만 깊게 파인다. 전체적으로 너(당신)는 마음으로 지어진 가상의 너이자 허구적 현실이다.

두 작품 모두 장단점이 있고, 비중이 엇비슷하다. 「문」에서는 ‘나/너’의 단순한 도식이, 「윤곽」에서는 일부 어눌한 표현이 걸린다. 논의 끝에 「윤곽」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시의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시상의 안정적인 전개와 동봉한 작품에서 보이는 상징성의 구축 등에서 믿음이 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아깝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분발을 부탁드리며 다음 해를 기약하기로 한다.


- 심사위원 : 곽재구 · 염창권(글)


운이 한 스푼 모자랐다. 완벽한 시는 얼마나 징그러운가. 고로 힘을 빼고 쓰자. 삼재도 끝났는데. 자가 위로 ㅎ

엄마, 고마워요. 누구보다 나 본심서 떨어졌다고 울어준 내 짝꿍, 박 성은 쌍둥이 언니, 사랑해.

혼자 떨어진 소감 지껄이기라도.

본심까지 올라간 시 두 개 중 하나를 올려본다.


                     



                        문                                                          




                                                          박 상은    




내 마음에 네가 담겼을 때 나는 어디로 갔을까

내 마음에서 넘친 너의 마음 속엔 나가는 문 밖엔 없었을까  


일기를 쓴다. 쓰지 않는 연필을 깎는다. 세상의 모든 문은 네모난데 작은 새들의 눈과 태양, 씨앗, 너에 대한 소문을 듣는 내 귀는 동그랗다. 문 안에 꽃다발처럼 접혀 있는 기억들이 네모나게 날아다닌다. 곧 눈이 오리라. 모서리가 닳아서 모든 문 안으로 내리는 눈송이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 눈송이마다 저녁이 붙어있다. 나는 밥을 하고 너는 마당을 쓴다. 마당은 자꾸 넓어져서 너는 저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그러다가 돌아오지 않은 날이 있었다. 나는 오두막에 들어앉아 폭삭 늙을 때까지 시를 쓰고, 지나가는 새소리를 모으기도 했다. 눈송이 마다 굴뚝에서 연기를 피운다. 마당에 나가 눈을 쓸었다. 마당은 자꾸 깊어졌다.  


봄이 오면 문이 열린다.  

눈송이 안에는 모서리가 자란다.  

지붕 밑을 책갈피 한 고드름

물이 떨어진다

문이 녹는다  


내 마음에 네가 담겼을 때 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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