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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솥 안에 대왕카스테라가 살고 있어요.

섭식장애 이야기 12 - 잠복기

by 노래하는쌤

얼마 전부터 일요일이면 아버지가 다니는 주일학교에 참석하고 있다. 만례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속옷과 양말까지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려놓는다. 평소에는 대충 물만 묻혀서 학교에 가는데 일요일이면 거울 앞에 앉혀놓고 분무기로 머리에 물을 뿌려 양갈래로 곱게 빗어서 묶어준다.


“할머이. 나 머리 이래 안 해도 된다이. 이래 하믄 머리가 땡겨서 뒷골까정 땡긴당깨.”


“오매. 가만 있어봐라잉.”


“아따매. 그라고 티도 안난디 머단다고 귀찮게서리 다림질까지 해겠는가.”


“깨까다니 허고 댕겨야 시피안본당깨. 암말도 허덜 말고 내 허고자픈데로 하게둬라이.”


오전에 주일학교 예배가 끝나면 오후예배가 끝난 후 아버지가 만례씨집에 데려다줄 때까지 그 동네를 별이오빠를 따라 누비고 다녔다. 내성적이여서 사람을 사귀기 어려워하는 나를 별이오빠는 손을 잡고 여기저기로 데려가 주었다.


하루는 별이 오빠가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었다.


“니 놀고자픈 사람 있냐아? 아니면 어데 놀러 가고자픈데 있으면 말해봐라잉.”


그때도 나는 언니들을 참 좋아했다. 얼굴도 예쁘고 말도 예쁘게 하는 혜란이 언니가 참 좋았다.


“글안해도 내가 혜란이 언니한테 언냐네 집에 놀러가도 되냐고 물어본께. 와도 된다고 하드라.”


“그라믄 내가 혜성이 성한테 니랑 나랑 가도 되냐고 물어볼랑께. 가도된다고 하믄은 오늘 예배 마쳐블고 거그 놀러가자잉.”


예배가 끝나고 혜란이 언니랑 혜성이 오빠가 먼저 집으로 갔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 우리가 놀러 와도 되는지 물어보고 전화를 주기로 했다. 교회 사택에 들어가서 혜란언니 전화를 기다린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놀러 와도 된다는 언니의 전화를 받고 언니네 집으로 별이 오빠를 따라서 간다. 밭을 한참을 지나 사람 하나 지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풀숲을 계속 걷다 보니 혜란언니집이 멀리서 보인다.


“오빠. 나 풀에다가 다리 쓸켜갔고 겁나 씨롭다이.”


“가갖고 안티프람좀 돌라해서 발라주께.”


1시간은 넘지 않았지만 상당히 오래 걸려서 혜란이 언니집에 도착했다. 언니가 현관 앞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혜란언니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었다.


“언니 잠옷 지인짜 이쁘다이. 이쁜 언니야가 입응께 차말로 더 이쁘다이.”


“씨잘대기없는 소리 고만허고 여로운께 얼렁 들어와라이.”


별이오빠가 어느 틈에 혜성이 오빠한테 안티푸라민을 받아와서 종아리에 발라주고 난 뒤 혜성이 오빠랑 겜보이로 게임을 하러 옆방으로 갔다.


나는 혜란언니랑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었을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키득키득 웃고 떠들다가 집에 갈 시간이 다 될 쯤에 혜란이 언니네 엄마가 집에 오셨다.


“오메 여까정 손님이 와겠는디 묵자것도 없어서 미안시롭네잉.”


“집에 가갖고 밥 묵으면 돼요. 괜찮해요.”


“별아! 쌤아! 아줌마가 얼렁 카스테라 맹글어 줄랑께 쫌만 지달려라잉.”


아주머니가 부엌에 들어가셔서 카스테라를 바로 가지고 나오신다. 은쟁반에 카스테라를 올려놓고 칼로 뭉텅뭉텅 썰어서 우유와 함께 내어 주신다.


“오메 아침에 맹글어 놓고 갔는디 안 묵고 그대로 있고만.”


‘차말로 부드럽고 맛나블고만, 만례씨도 갖다 주고자파브네이.’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별이오빠는 몇 입 먹더니 혜성이 오빠랑 게임하러 방으로 금방 들어간다.


“혜란언니는 안 묵어?”


“우리는 맨날 묵어 갖고 오빠랑 내는 잘 안 묵는다이.”


잔뜩 남은 카스테라 빵을 보니 카스테라를 좋아하는 만례씨 생각이 더 난다. 한 번도 어디가서 뭘 싸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용기를 내서 혜란언니에게 말한다.


“언니 요거 쪼까 싸가도 되까? 내 울 할머이 갖다 주고자픈디?”


“당연히 되재.”


내가 하는 소리를 혜란이 언니네 엄마가 들었는지 부엌에서 나오면서 카스테라빵을 새로 해주겠다고 하신다.


“오메. 쌤이는 맘씨도 이삐다잉. 아줌마가 얼렁 새로 맹글어 줄랑께. 할머니 갖다 드려라잉.”


“요 있는것이믄 충분한디요.”


“으른한티 드려야쓴디 아줌마가 얼렁 새로 해줄텡께 쪼까만 지달려라잉.”


아주머니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밥솥으로 대왕 카스테라를 만들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카스테라를 커다란 철쟁반에 솥을 뒤집어서 통째로 올려놓는다.


“식혀갖고 줄랑께 할머니 가져다드려라잉. 얼렁 부지런히 묵고 인자 집에 갈준비 해야쓰겄다야.”


혜란 언니네 아주머니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별이오빠랑 교회 사택으로 간다. 아버지는 나를 만례씨집 근처 골목 어귀에 내려 주고 다시 아버지집으로 가셨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카스테라가 모양이 망가지기라도 할까 봐 양손에 조심히 안아서 만례씨 집으로 달려간다. 대문을 들어가면서부터 만례씨를 부른다.

“할머이, 할머이!”


“아따 걸어댕기랑께 자뿌라지믄 어째블라고 그러냐이.”


만례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턱에 걸려 철퍼덕 넘어지고 만다.


“오메. 안 다쳤냐잉. 아따 찬찬히 댕기랑께.”


안고 있던 카스테라가 볼품없이 찌그러진다. 머가 그리도 서러웠는지 속이 상해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만다.


“어어엉. 흑흑 나가 할머이 흑흑. 줄라고 흐흑. 갖고 왔는디 어어엉. 모다 짜부라져브렀어. 으아아아앙 흑흑흑......”


“아따매 뱃속에 들어가블믄 다 똑같아븐디 머시 어찐다냐. 개안해야. 니 안다쳤응께 돼븟재.”


만례씨의 축져진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다가 진정을 한다. 만례씨가 다 찌그러진 카스테라를 먹기 좋게 잘라서 방으로 가지고 온다.


“아따 맛나다야.”


“할머이. 나가 난중에 맹그는거 배워 갖고 이삐게 맹글어 주깨.”


만례씨가 맥심커피에 카스테라를 찍어서 사르르 녹여서 맛있게 먹는다. 내 속상한 마음도 조금씩 사르르 녹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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