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이야기 13 - 잠복기
아버지가 사시는 마을에 국민학교 분교장이 생겼다. 학교장선생님께서 아버지 사시는 마을교회 목사님께 학생수를 채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셔서 내가 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원치 않았지만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고 만례씨와 잠시 떨어져 살게 되었다.
금룡국민학교는 금황마을에서 살 때보다 학생수가 훨씬 적어서 한 반에 10여 명쯤 되는 세 학년이 모여서 수업을 받았다. 금황국민학교는 학년마다 선생님이 달랐는데 금룡국민학교는 선생님 세 분이서 모든 학년을 다 가르쳤다.
이미 다 배운 내용을 또 배우는 거라 금룡초등학교 수업은 재미없고 지루했다. 하루 종일 쓰기의 반복이었다. 차라리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하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금황마을에 살 때는 아이들이 이것저것 잡으러 다녔는데 금룡마을의 아이들은 각종 열매와 식물을 따러 다녔다. 그래도 좋았던 건 금룡마을 아이들은 무조건 먹어보라고 하지 않았다.
호두, 도토리, 개암, 버찌, 보리수, 오늘은 밤이다. 그렇지 않아도 밤을 따보고 싶었던 터라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기대가 가득했다.
연정이라는 아이가 손을 내민다. 키가 나보다 얼굴 두 개는 더 있다. 중학생 언니인 줄 알았는데 나랑 동갑 아홉 살이었다.
“내 따라오믄 된다이.”
뒷산에 밤을 따러간다. 아이들 손에는 망태기랑 바구니를 다들 들고 있다. 나만 빈손이다.
“인자 떨어진다이.”
6학년 오빠가 밤나무를 타고 올라가 밤나무 가지를 흔든다. 연정이가 내 머리에 망태기를 씌워준다. 밤송이가 여기저기 떨어진다. 내 머리에 씌워진 망태기 위로 밤 한 송이가 떨어진다.
“니 발로 한 번 까볼래?”
“어.”
한쪽 발로 밥송이 한쪽을 고정하고 남은 한쪽 발로 살살 밀자 밤송이가 벗겨지며 반들거리는 밤 3알이 쏙 나온다.
“잘하고만? 니 밤 까본 적 있냐이?”
“아니, 나 처음이여.”
“그란디, 잘 허네이.”
연정이가 이번에는 장대로 밤을 따보라고 한다. 대나무 끝을 벌려 그 사이에 막대를 끼운다. 대나무장대를 밤송이가 달린 방향으로 가져간다. 허깨비 같은 내 몸이 대나무장대랑 같이 휘청거린다.
얼굴을 들어 밤나무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해와 눈이 마주친다. 환하다 못해 새하얀 햇살에 너무나도 눈이 부신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논다. 하늘이 노래지며 스르르 몸이 뒤로 넘어간다.
‘털썩.’
연정이가 나를 업어서 교회 사택으로 향한다. 사택에 거의 다다를 때쯤 정신이 든다.
“니, 갠찮해?”
“인자, 갠찮하다이. 역까지 니가 업고 온 거여? 고맙다이.”
“어른들 읍는갑고만 개찮하겄냐이?”
“응. 갠찮해야. 얼렁가도 된다이.”
연정이는 나를 사택 앞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아이들에게로 간다. 아버지가 집에 오실 시간이 한 참 남았다. 저녁밥을 승종이네 집에 가서 먹고 오라고 했는데 거기까지 갈 기운이 없다.
사택 문이 잠겨 있다. 사택 뒷문 쪽으로 가서 창틀을 밟고 쪽창으로 넘어가려고 유리문을 연다. 다리한쪽을 먼저 집어넣고, 몸을 마저 집어넣어 넘어가려는데 어쩐지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아뿔싸!
쪽창 유리문 사이를 넘어가던 내 몸이 다 넘어가지 못하고 허벅다리에서 걸린다.
‘어?’
1년 동안 내 몸이 서서히 자란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다리를 다시 빼려고 해도 몸이 꽉 껴서 뺄 수가 없다. 지탱하고 있는 한쪽 발에 점점 무게가 실린다. 피가 점점 한쪽에 쏠리고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점점 얇은 유리로 내 몸의 무게가 넘어간다.
‘쩍ㅡ.’
쪽창 유리가 ‘쩍’ 소리를 내며 깨진다. 왼쪽 허벅지가 유리에 찔려 피가 철철 흘러나온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만례씨가 아버지께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지 나는 금황초로 다시 전학을 왔다. 그리하여 나는 만례씨와 다시 지내게 되었다.
“쌤아, 쩌참에 밤 따블고 자프다고 혔지?”
“어쩌고 알았능가?”
“니가 내한티 진즉에 말 했시야.”
만례씨는 밤나무집 은재네 할머니한테 부탁을 해서 밤나무에서 밤을 따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내 한갓 질 때게 가브러갔고 싸게 밤 따블자.”
신이 나서 만례씨 뒤를 졸래졸래 쫓아서 밤을 따러간다. 만례씨가 손잡이가 달린 대바구니를 내 손에 들려준다.
“첫 참에는 머리에 써블고 있어라이.”
만례씨가 밤나무를 흔들자, 밤송이가 툭! 툭! 떨어진다. 만례씨가 장대를 주면서 나더러 밤을 따보라고 한다. 대나무장대에 밤을 걸어서 가지를 비틀어 밤을 톡톡 딸 때마다 내 마음에서 행복이 톡톡 터진다.
“이것이 그라고 허고 자팠냐이?”
“어, 할머이 내 겁나게 재미지고, 좋아븐당깨.”
“니가 그라고 조아해싼께. 내도 겁나게 좋아븐다야.”
대바구니에 밤을 잔뜩 담아 은재할머니께 가져다 드린다.
“우리 집은 묵을 사람이 읍써야. 니 다 갖고 가서 묵어블어라.”
“감사합니다.”
“니기 할매가 누구 한티도 생전 부탁 안 허는 양반이어야. 그란디 니 밤 따게 해 주고 자프다고 봉투까지 줌서 부탁하드라. 요, 손 안대블고 그대로 뒀은께 니기 할매 갔다드려라이.”
은재 할머니가 봉투와 함께 땅콩사탕 한주먹을 쥐어주신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양손 가득 만례씨와 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은재할머니께 받은 봉투를 할머니께 드리자, 아무 말도 없이 성경책에 끼워 놓으신다.
만례씨가 밤을 쪄서 으깬다. 꿀을 섞어서 동글동글 알사탕 모양으로 만들어준다.
“밤이 그라고 영양가가 많아 븐다고 하드라. 묵고 자플 때 묵어라이.”
“할머이, 고마워. 내 난중에 돈 마이 벌어서 할머이 맛 난거 마이 사줄께이.”
“씨잘대기 읍는 소리 고만허고 잘 묵기나해라이. 내는 인자 밭에 갈랑께. 쉬고 있어라이.”
‘밤만 따줘 블겄냐? 니가 돌라하믄 별도, 달도 몽씬 다 따줘블재. 어쩌든지 잘 묵고 건강하기만 하란마다.’
만례씨가 동글동글 만들어 놓은 꿀밤을 보며, 만례씨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잔뜩 모가 났던 내 마음도 다시 동글동글 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