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이야기 15
며칠 전 꽃분이 언니네 엄마가 아프다는 전화를 만례씨가 받았다.
만례씨는 창고에서 호미를 가지고 나와서 집 앞 텃밭에 심어진 토란을 캔다.
"다음다음 주에나 캔담서 왜 뻘서 캐븐가?"
"꽃분이 어매가 아프단디 입맛이 읍써서 잘 묵도 못헌다고 하더랑깨."
"캐갖고 갖다 줄라고 그랑가?"
"그랴. 담주에 갖다 줄라면 몬야 캐갖고 몰려야 써야. 꽃분이 어매가 토란국을 질로 좋아한담마다."
"할머이, 나도 같이하믄 안 됭가?"
"머슬 헐라고 혀 쌌냐. 밭일하믄 내 손마니로 니 손도 몬양 읍써져븐당께."
"글믄 어찐당가. 몬양 업어져도 암시랑토 안하당깨."
"니는 암시랑토 안혀도 내는 니 손에 흙 묻히기 싫당깨."
"아따, 할머이 별시랍네이."
"잔말 허덜말고 옥수시 찌놓은거나 묵음서 기냥 보기나 혀라."
내가 뭘 하겠다고 하면 웬만해선 다 하라고 하는 만례씨가 밭일만은 한사코 못하게 한다. 만례씨가 토란을 캐는 동안 옆에서 하릴없이 찐 옥수수를 한 알 한 알 떼어서 세월아 네월아 먹고 있다.
"할머이, 내도 해보고자프당깨는..."
나의 간절한 눈빛에도 만례씨는 대답이 없다. 그러더니 대뜸 나를 부른다.
"쌤아, 꽃분이 어매가 무화과도 좋아항깨. 그라믄 거그서 가차운 놈으로 무화과 한 열댓 개만 따라이."
"무화과도 묵는 거여?"
나는 지금까지 무화과를 만례씨가 따거나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토란이 심어진 텃밭 옆에는 무화과나무 2그루가 있다.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리면 늘 개미와 참새들의 밥이었다.
"고놈이 원래 묵는 거여. 니가 주랭주랭 열려븐 것은 모다 궁금해라 해싼디, 무화과는 신경 본양도 안 항께 나가 말 안 했능갑고만."
"묵어봐도 됭가?"
"와메, 글믄 되블재 안 되블겄냐잉."
만례씨가 차례차례 무화과 먹는 방법을 설명해 준다. 흐르는 물에 씻어서 꼭지를 따고 껍질을 벗겨서 먹으라고 알려준다. 한 입 베어 물자 혓끝으로 달달함이 전해져 온다. 참깨를 씹는 것과 비슷한 식감이 재미있어서 입에서 가루가 될 때까지 씹고 또 씹는다.
"할머이, 무화과 맛나네이. 할머이도 한나 까줄랑께 묵을랑가."
"내는 고거 통 안 좋아한디 함 묵어볼란께. 줘봐라이."
만례씨가 알려준 데로 수돗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무화과 하나를 씻는다. 꼭지를 따고 껍질을 벗겨서 먹기 좋은 크기로 손으로 갈라 만례씨 입에 쏘옥 넣어 준다.
"왐마, 머시 맛난지도 몰르고 안 묵었는디 니가 준께 맛나블고만."
무화과 간식 시간이 끝나고 만례씨가 토란을 마저 캐는 동안 무화과를 딴다. 잘 익은 무화과를 따서 흐르는 물에 씻어서 꼭지 부분을 가위로 자른다. 평상위 신문 위에 면포를 깔고 무화과를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쌤아, 찬통잠 둘다 갖고 오니라이."
부엌에 가서 2층 찬합세트 2개를 가지고 나온다. 만례씨가 내가 딴 무화과를 찬합에 열 맞춰 담는다.
"요것은 니 것이여. 더 묵고 자프믄 말해라이. 냉장고에 느 넣고 묵고 자플 때 묵어라이."
만례씨가 가장 예쁘고 잘 익은 무화과를 넣은 찬합을 나에게 건네준다.
"니 잘 묵을 줄 알았으믄 진즉에 묵으라고 할 것인디..."
"인자 묵으믄 되블재. 나코 쪼까씩 묵으깨."
만례씨가 토란손질을 끝내고 무화과나무 높은 곳에 달린 무화과를 마저 딴다. 깨끗하게 손질해서 내 전용 간식 찬합에 담는다.
"이놈은 냉동실에다가 느 놓을랑깨. 묵고자플때 끄내놨다가 묵어라이."
"알았다이. 할머이 인자 욜로와서 등 좀 붙이소."
만례씨가 거실에 눕자 나도 만례씨 옆에 따라 눕는다.
"근디 할머이, 무화과는 꽃이 읍써서 이름이 무화과여?"
"아니여 밖으로 안 뱅인디, 속 알창시에 있는거이 꽃이여야."
"글믄 내가 꽃을 묵은 것이여?"
"그랑깨 그라고만."
꽃을 먹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도 재미있는 일이 아닌데, 그때는 왜 그리도 재미있었는지 꽃을 몇백 송이를 먹었다면서 웃고 또 웃었다. 씨를 먹으면 뱃속에서 열매가 자라고, 꽃을 먹으면 뱃속에서 꽃이 자라는 줄 알았나 보다.
'무화과 꽃이 피었습니다.'
내 마음에 무화과 꽃이 활짝 피었다. 만례씨 얼굴도 활짝 피었다. 그러기를 내가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