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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와 함께 술 한잔

섭식장애 이야기 16

by 노래하는쌤

“쌤아, 꽃분이네 갈란디 니도 갈라믄 갈 채비 해라이.”


만례씨의 말에 방으로 들어가 모자와 끈 달린 동전지갑을 챙겼다.

자두맛 사탕 세 알을 꺼내 하나는 입에 물고, 두 알은 지갑에 넣어 메고 나왔다.


꽃분이 언니네는 작년에 언니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다녀온 뒤, 이번이 두 번째다.

만례씨는 부엌에서 토란국 한 솥과 무화과가 든 찬합을 보자기에 단단히 싸며 말했다.


“국민학상은 뻐시비 읍응께, 기사 아저씨한티 인사 잘 혀라이.”


“알았다이.”


“거그는 수퍼도 읍담마다. 그랑께 만물수퍼잠 들려야 쓴다이.”


만례씨는 만물슈퍼에서 요구르트 다섯 줄 두 세트와 유가사탕, 계피사탕, 자두맛 사탕을 골라 담았다.

계산을 마친 뒤, 뜯은 자두맛 사탕봉지에서 사탕 세 알을 쥐어주며 “입 심심할 때 묵어라이.” 하고 웃었다.

사탕 하나를 입 안에서 굴리며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내려갔다.


철야 동창터미널에서 세지면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면사무소 앞에서 내려 소나무 뒤길을 한참 걸었다. 철문을 덧댄 꽃분이 언니네 집이 보일 때쯤, 담벼락 끝에서 혼자 놀던 꽃분이 언니가 달려왔다.


“오셨어요? 엄마가 오늘 고모할매 온다고 나가 보래서요.”


“그랴. 잘 있었냐이. 아이마다 일로 와보니라.”


만례씨는 가방을 뒤적여 요구르트 두 세트와 천 원짜리 다섯 장을 건넸다.

꽃분이 언니는 요구르트를 비닐도 벗기지 않은 채로 빨대를 꽂아, 집으로 들어가는 동안 벌써 다섯 개를 비웠다. 집 안에서는 하얀 끈을 머리에 동여맨 꽃분이 언니네 엄마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고모님, 와겠어라. 내는 맨날 앓는 소리만 해싸서 지송해라.”


“머시 지송하당가. 아픈 사람이 머던디 일났능가. 얼른 누워 있으소.”


“오메, 쌤이도 와브렀냐이. 정희 어릴 적이랑 마이 탁했다야이. 무장 이뻐져부렀네.”


만례씨가 부엌에서 토란국과 반찬을 차려와 상을 내밀었다.


“들깨개루 몽씬 느가 끼랬응께, 어여 숟가락 좀 드소.”


“염치가 읍지라… 근디 입맛이 이라고 떨어져블믄 고모님 토란국만 생각나브러싸서 큰일이여라.”


“내한티 무신 염치를 따지고 지랄이여. 묵고 싶으면 은제라도 전화하소. 구만리도 아닌디.”


식사 후, 만례씨는 나와 꽃분이 언니에게 “나가서 놀다 오라”고 손짓했다.

뒷산에 가기 전 밭길에서 처음 보는 붉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 이 꽃 이름이 머여?”


“엄니가 갈켜줬는디 까묵어븟다야. 우리 집 뒤 밭에도 숭거져 있는디.”


우리는 토끼풀로 팔찌를 만들고 돌멩이를 모아 공기를 하며 한참을 놀았다.

해가 기울 무렵 만례씨가 부르자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이, 쩌 꽃 이름이 먼 꽃이여?”


“상사화여야. 어째 쩌 것도 이삐냐?”


“어. 내가 본 꽃 중에 질로 이쁘당께.”


대문을 나오는데 꽃분이 언니네 엄마가 검은 봉지를 들고 따라왔다.


“고모님, 여 갖고 가랑깨요. 쩝때게 말헌 양귀비여라.”


“아따, 나가 요즘 약주를 안 묵는당께.”


“약으로 묵으랑깨요. 삭신 애릴 때 좋고, 소화도 잘 시킨답디다.”


“그랴, 그람 함 줘 보소. 아그들도 묵어도 됭가?”


“그람요. 물에 한 숟구락 타갖고 꽃분이도 맥인당깨요.”


만례씨는 소화가 잘 된다는 말에 양귀비 모종과 양귀비주를 받아 들며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장터에 들러 상사화 모종을 사 왔다.


만례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상사화를 마당 오른쪽 돌턱 옆에 조심스레 심었다.

꽃분이 언니네 엄마가 준 양귀비 모종은 화장실 앞 토란대 옆에 줄 맞춰 심었다.


마음 아픈 이의 손에서 건네받은 양귀비, 길가에서 눈길을 붙잡던 상사화,

세월과 함께 피고 지는 울긋불긋 꽃들이 하루하루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만례씨 집 앞마당을 채워갔다.


내 마음에도 만례씨의 애정이 하루하루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채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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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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