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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꿀이 죽은 돼지고기로 만드나요?

섭식장애 이야기 14

by 노래하는쌤

일요일이면 이제 아버지가 다니는 교회 주일학교에 매주 간다. 만례씨는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내 옷 중에서 만례씨가 보기에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꺼낸다. 작은방에 있는 다리미와, 다리미판을 가져와서 속옷과 양말까지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려놓는다.


아침을 먹고 양치를 하고 나면 만례씨는 나를 거울 앞에 앉혀놓고 머리를 양 갈래로 묶어준다. 이제 만례씨의 머리 묶는 솜씨가 제법 좋아져서 머리꼭지가 아프지 않게 살살 당겨서 묶어 준다. 나 또한 익숙해진 일과에 만례씨가 말하지 않아도 거실 팔각교자상에 분홍색 분무기, 하얀 참빗, 빨간 동그란 탁상거울, 보라색 방울머리끈 2개를 미리 준비해 놓는다.


“어른들 보믄 인사 잘 허고, 대답 잘 허고, 잘 묵고 요놈 세 가지만 잘 혀도 반은 묵고 들어가는 것이여.”


“알았다이.”


“고개로 까딱 까딱 허덜 말고, 꼭 니 목소리로 대답 잘 혀라이.”


“알았당깨.”


“나가 오늘 목포 동상 집에 잠 댕겨 올랑깨. 이따가 사님이 성님 오믄 몬야 자고 있어라이.”


“안 자블고 기냥 올라고?”


“봐서 안자고 걍 올라믄, 해 늠어가기 전에 니기 애비한테 전화할텡께. 교회 잘 댕겨오니라이”


1년에 두 차례 교회에서는 심방기간이 있다. 한 달 정도의 심방기간에는 오후예배가 끝나면 교회 성도님들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먹는다. 지지난주는 배과수원집 보람언니네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지난주는 금룡수퍼집 강용이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번 주는 과일즙건강원 승종이네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간다.


승종이는 형제가 8남매다. 시계초침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만례씨 집과는 달리 승종이 집은 시끌벅적 귀가 쟁쟁 거릴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오늘은 옆집과 그 옆집 과수원 아이들까지 와 있어서 12명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숫자를 세다 보니 어디선가 또 새로운 얼굴이 보인다. 아마도 15명은 되는 것 같다.


승종이 집은 식구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방에 나무로 된 2층 침대가 양 옆으로 놓여있다. 침대에는 이불더미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이 양쪽 침대 위를 휙휙 넘나 든다. 머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베개를 던지고 또 던진다. 웃고 떠드는 소리에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려 온다.


베개와 작은 이불 하나를 주섬주섬 챙겨서 2층침대와 장롱사이 틈새를 찾아 들어간다.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이불더미로 가리고 조용히 기대어 눕는다. 저녁식사 때까지 쥐 죽은 듯이 새우잠을 청한다.


"언니, 인나서 밥 묵어."


"어? 어. 알았다이."


승종이 여동생이 와서 나를 깨운다.


"와. 꿀꿀이 죽이다. 맛있겠다."


"아싸! 나 면 마이 묵을꺼여."


'꿀꿀이 죽이 머여? 돼지고기로 맹글어 블었으까?’


커다란 들통과 커다란 국자와 대접이 한 스무 개가 밥상 위에 있다. 아이들은 익숙하게 대접에 국자로 꿀꿀이 죽을 떠서 밥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맛있게 먹는다. 라면, 콩나물, 계란, 밥, 떡국떡, 대파가 들어있다. 그리고 처음 보는 거무스름한 정체 모를 것이 잔뜩 들어있다.


"이거이 머여?"


"아, 거슨 미더덕이여."


"이것도 묵는 거여?"


"어, 걍 끔처럼 씹어 블다가 배타 블어도 되고, 걍 씹어 묵어 블어도 돼."


나는 미더덕을 담지 않기 위해 국자를 요리조리 피해 꿀꿀이 죽을 최대한 조금 담는다. 다들 온 힘을 다해 놀아서 배가 고팠는지 나만 빼고 정신없이 먹는다. 다행히 내가 먹는지 안 먹는지 관심조차 없다. 계란 외에는 섞어서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숟가락을 입에 가져가지 못하고 휘적휘적하고만 있다.


"니는 왜 안 묵어? 얼렁 묵어."


승종이의 질문에 자동반사적으로 꿀꿀이 죽을 한 숟가락 퍼서 입에 집어넣는다. 식감이 거칠 거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 미끄덩 거리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입속으로 쏙 들어왔다. 정체불명의 음식이었던 미더덕이다. 뱉지도 못하고 씹지도 못하고 입속에서 고민만 한 참 하다가 꿀떡 삼킨다.


잔잔하게 울렁거림이 올라온다. 더는 먹지 못하고 아이들 동태를 살살 살피다가 대접을 포개서 치운다. 다들 한 대접씩 후딱 먹고 한시라도 더 빨리 놀려고 달려 나간다. 다행히 내가 밥을 먹지 않아도 알지 못한다. 먹은 거라곤 죽 한 숟가락 밖에 없는데 음식이 가득 찬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만례씨집에 돌아오니 만례씨는 목포할머니집에 가고, 사님이 할머니가 와 계신다.


"할매요. 우리 할머이한티 전화 왔능가?"


사님이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좌우로 흔든다.


명치가 계속 답답하고 몸이 뜨근한 것 같다. 아무래도 승종이집 침대모서리 구석에서 새우잠을 청할 때 몸에 한기가 들었나 보다. 아침에 계란밥 조금 먹고, 점심은 교회에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저녁은 꿀꿀이 죽 한 숟가락 먹은 게 전부라 허기가 지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속이 개운치 않아 집에 와서도 더는 먹지 않는다. 기운이 없어서 이불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구긴다.


스르르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해거름 녘이 조금 지나고 사님이 할머니가 내 팔을 흔들어 깨운다. 정신이 몽롱한 나에게 숟가락에 해열물약을 따라 내민다. 아무 저항 없이 받아먹고 스르르 다시 잠이 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조금씩 조금씩 든다. 내 이마 위에는 시원 미적지근한 물수건이 올라와 있다.


'브르으으왕, 브릉브르왕'


'끼리익'


밖에서 심상치 않은 빗소리와 함께 오토바이소리가 들리더니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여섯 걸음, 일곱 걸음, 딱 여덟 걸음참에 만례씨가 현관문을 벌컥 연다.


"쌤아, 쌤아! 성님 쌤이 어찌요?"


사님이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만례씨 목소리에 없던 기운이 살아나고 서러움이 복받쳐온다.


"할머이, 내 여그가 꽉 맥혀븐거마니로 답답혀 죽겄당깨."


만례씨가 반짇고리함에서 실과 바늘을 꺼낸다. 내 팔뚝부터 손목까지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려 엄지손가락 마디 윗부분을 실로 묶는다. 마디를 굽혀 바늘로 엄지손톱 위를 찌른다. 검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반대편 손가락도 마저 바늘로 찌른 후 만례씨는 내 등을 밑에서 위로 살살 쓸어 올린다.


잔잔하던 속이 다시 울렁거린다.


'우우욱'


물토와 함께 알갱이 하나가 툭 튀어나온다. 저녁에 먹었던 미더덕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옆에 있던 사님이 할머니가 바가지와 걸레를 가지고 와서 맨손으로 토사물을 정리한다.


"오메, 나가 차말로 니 못 미챠서 어델 갈 수가 읍써븐당깨."


"할머이, 목포서 자고 오능거 아니여?"


"니가 열이 허벌천나게 나븐단디 나가 창아리 읍씨 거그서 자겄냐?"


"그란디 어쩌고 왔능가?"


"경재한티 오도바이 태달라 했재."


"아따마, 무사서 타도 못함서 어쩌고 타븟당가? 비도 허뻐지게 와블고만은 얼렁 옷 갈아입으소."


비에 쫄딱 젖었던 만례씨가 그제야 빗물을 마저 닦고 옷을 갈아입는다. 한두 시간이 지난 후 만례씨가 매실주 두 잔과 따뜻한 매실차 한 잔을 타서 가지고 온다. 만례씨가 사님이 할머니에게 매실주를 먼저 건네주고 나에게 매실차를 건네준다. 열도 떨어지고 속도 편해진 나는 기분 좋게 잔을 들어 올린다. 익숙하게 만례씨가 내 잔에 짠을 해준다. 사님이 할머니도 잔을 슬며시 가져다 댄다.


"인자 살어났능갑네. 나도 인자 살겄다 살겄어. 나가 차말로 여 오는 동안 니땀시 영금을 봐브렀당깨."


만례씨 말에 사님이 할머니가 배시시 웃는다. 나도 따라서 같이 웃는다.

만례씨가... 만례씨는 울다가 또다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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