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이야기 11 - 잠복기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왔어요. 양계장에서 직접 가져온 굵고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 한판에 1,900원, 두 판에 3,500원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왔어요.”
계란장수 아저씨가 트럭에서 계란을 팔고 있다.
“쌤아. 퍼뜩 가 갖고 계란 두 판만 사들고 오니라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만례씨가 속주머니를 덧댄 고쟁이 안에서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지폐 4장을 꺼낸다. 손을 바지춤에 쓱쓱 닦더니 지폐를 손바닥으로 빳빳하게 펴서 내 손에 쥐어준다.
“거시름돈은 돼얐다고해라이.”
“안녕하세요? 아저씨 계란 두 판만 주세요. 할머니가 거스름돈은 안 주셔도 된대요.”
천원짜리 지폐 4장을 다시 한번 쫙쫙 펴서 드린다.
“아따 회진덕 손주고마이. 솔찬히 무거울 낀디 우야들고 갈라 그러냐이? 내 들어다 줄 구마이.”
“감사합니다.”
“니는 밥 좀 마이 묵어야 쓰겄다야. 여 받아라이. 욜로 께끼하나 사 묵어라.”
“감사합니다.”
계란장수 아저씨가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주신다.
“아야. 난중에 뼝아리 한번 키워보고자프믄 아저씨한테 말해라이. 담에 올 때 갖다 줄랑께.”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계란을 부엌으로 가져가서 선반에 올려두고 그 옆에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올려놓는다. 만례씨가 어디서 난 돈인지 묻지도 않고 빨간 돼지저금통에 넣는다. 언제든지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면 꺼내서 사 먹으라고 만례씨가 사다준 내 간식 저금통이다.
만례씨는 아궁이에서 갓 지은 쌀밥을 사기 국그릇에 계란 두 알을 넣어 간장, 참기름을 넣고 계란밥을 만든다. 유년 시절 동안 몇 년간 내가 먹은 주식이다.
“역불로 묵지 말고 묵을만치만 묵고 냉개라이. 지지리 묵고 또 게워블믄 암짝에도 쓸모 읍씅께 찬찬히 묵어라이.“
“그랄게. 근디 할머이.“
“와. 고새 못 묵겄어?”
“아니여. 내 뼝아리를 길르고 잡든 안 헌디 알 깨고 나오는 건 그래 보고 잡네이.”
“그랴아? 쪼까 몇 날만 기다려봐라이.”
3일 밤이 지나고 양계장을 운영하는 현상이 아저씨가 양계장 구경을 시켜준다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너무 신기해서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닭이 낳은 알이 또르르르 굴러가서 알 크기별로 자리를 찾아가면 거기 계신 아주머니들이 계란판에 계란을 정리한다.
현상이 아저씨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양계장 앞마당에 포대를 동그랗게 둘러서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
“쌤아 일로 와서 봐라. 여기 알 깨고 곧 병아리가 나오려고 한다.”
‘톡 톡톡 톡.’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온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왼쪽 눈 가장자리에 눈물이 고인다. 눈앞에 번갯불이 내리치는 것처럼 순식간에 주위가 온통 환해지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터져버릴 것만 같다. 진기한 광경을 내 작은 가슴이 감당을 못해서인지 해가 너무 뜨거워서인지 까무룩 또다시 기절을 하고 만다.
“쌤아. 아저씨 엄청 놀랬다. 한 번씩 쓰러진다고 할머니가 말해주긴 했는데 그래도 아저씨가 얼마나 놀랜 줄 아냐?”
보들보들한 담요에 누워 만례씨집 색 바랜 누런 벽지와는 달리 곱디고운 꽃무늬벽지를 멍하니 바라본다.
“아저씨가 데려다줄 테니깐 조금만 더 누워서 쉬고 있어라. 앞으로 계란 자주 가져다줄 테니깐 아저씨 며느리 되려면 잘 먹고 더 튼튼해져 된다. 우리 쌤이가 계란을 제일 좋아한다고 할머니가 말해주시더라.”
그날부터 계란이 떨어질 때쯤 되면 만례씨 현관 앞에는 계란이 늘 놓여있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초란을 보내주신다.
“현상이 그 노마가 잔상시랍게도 속정이 겁나븐당깨. 나코 현상이 아재 만나믄 잊어블지말고 고맙다고 해라이. 인자 언능 와서 따실 때게 계란밥 묵어라이.”
“할머이도 같이 묵잔께는……”
만례씨는 숟가락을 끝까지 들지 않고 굴비를 정성스럽게 발라 내 숟가락에 올려주며 내 입만 쳐다보고 있다.
“초란이 왔어요. 초란이 왔어요. 양계장에서 직접 가져온 싱싱한 초란이 왔어요.”
'사랑이 왔어요. 사랑이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