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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속 고추장은 누가 다 먹었을까?

섭식장애 이야기 9 - 폭식의 서막

by 노래하는쌤

날이 좋다. 해가 좋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장독대가 뜨뜻하게 데워져 있다. 항아리에 등을 살짝 기대고 자울자울 하다가 장독대 바닥에 아예 등을 붙이고 대자로 드러눕는다. 전깃줄로 만든 빨랫줄에서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는 난닝구 하나를 휙 잡아당겨서 얼굴을 가리고 본격적으로 낮잠을 잔다. 몸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다.


얼마나 잤을까? 눌린 팔에 잔돌이 잔뜩 박혀있다. 손으로 대충 털어낸 후 옆으로 몸을 돌려 지나가는 개미떼를 멍하니 지켜본다. 본인 몸뚱이만 한 음식 쪼가리를 들고 바삐도 간다. 장독대 깨진 돌 틈 사이로 차례차례 줄지어서 집으로 하나 둘 들어간다.


‘니네는 좋겄다이. 식구가 많아서리 심심하던 안컷다이. 나도 인자 들어가보까아?’


햇빛을 받아서 그런 것인지 진짜로 열이 있는 것인지 몸이 따끈따끈하다.


“장꽝에 눠쓸라믄 키라도 막가지로 기 놓고 자라이.”


“그랄게. 해름참까정 밭에 있들 말고 얼렁 댕겨 오소.”


“말 들어라잉. 해가 뜨셔서 꼬실라져서 디져블겄다이. 글 안혀도 히마리 한나도 읍시 히놀놀한디.”


만례씨가 어제도 장독대에 누워 있을 거면 키라도 받쳐 놓고 그늘 속에 누우라고 했는데 왜 말을 듣지 않았을까? 빨간색 고무다라이에 띄어져 있는 바가지에 물 한 바가지를 담아서 세수를 하고 나니 열감이 조금 가시는 듯하다. 아직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


오늘따라 항아리 속이 궁금하다. 열댓 개 항아리를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가장 큰 항아리에는 굵은소금이 들어있다. 한 꼬집 집어서 입으로 가져간다. 소금이 짜다 못해 써서 오만상을 쓰고 혀끝에 침을 모아 마지못해 삼킨다.


항아리 뚜껑을 순서대로 열어서 하나씩 하나씩 맛을 본다. 소금, 싱건지, 김치, 된장, 간장, 젓갈을 검지손가락으로 살짝 찍어서 먹어 본다.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항아리만 남았다. 뚜껑을 열자 고추장이 투명한 김장비닐에 담겨 고무줄로 묶어져 있다. 검정고무줄 매듭을 잡아당긴 후 빙글빙글 풀어서 고추장을 맛본다. 매운데 달달하니 맛있다.


왜 그랬을까? 이성은 온데간데없이 식욕만 남아 한 번 두 번 찍어 먹다가 바닥이 동이 날 때까지 죄다 퍼먹고 정신이 번쩍 든다.


명치가 슬슬 아려온다. 점점 쨍하니 쓰라려 온다. 칼로 긁어 대는 것 마냥 점점 더 사정없이 통증이 밀려온다. 수돗가로 달려가 고무 다라이에서 바가지를 채서 물을 퍼서 벌컥벌컥 마셔보지만 소용이 없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다 드러난 배퉁이를 양팔을 교차시켜 끌어안고 따뜻한 장독대에 누워 몸을 서서히 옆으로 돌린다. 몸뚱이에 눌린 왼쪽 팔꿈치가 돌바닥에 쓸렸는데도 아픈 줄도 모르고 살펴볼 여력도 없다.


등줄기부터 관자놀이를 지나 머리꼭지까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몸이 공벌레 마냥 한없이 말아진다. 눈가에 눈물이 모여든다. 시야가 시나브로 흐려진다.


“할머이. 내 죽겄어. 살리도... 할머이... 할머이... 할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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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