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이야기 10
고추장 소동이 난 후 만례씨가 아침저녁으로 쌀죽을 쒀다가 나른다. 그날 밭에서 돌아온 만례씨는 몸이 불덩이인 나를 들쳐 안고 집에 들어와 깨를 활딱 벗겨서 좌약 해열제를 넣고 밤새 미지근한 물로 몸을 닦았다고 한다.
으스름한 새벽녘이 돼서야 정신이 든 나는 내 머리맡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만례씨가 선명하게 보일 때까지 눈꺼풀을 반만 올리고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 바라본다. 눈이 스르르 감기며 다시 잠이 들 듯 말 듯하다가 점차 잠이 달아난다.
그러다가 만례씨의 거친 손이 눈에 들어온다. 투박하고 퉁퉁하니 누가보아도 고생을 많이 했음직한 검버섯이 가득하고 핏줄이 불뚝 튀어나온 만례씨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꺼무죽죽하게 토란물때가 껴있는 손톱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문득 어젯밤이 구역예배 날인 것이 생각이 난다. 순번이 아마도 우리 집 차례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머물며 자연스럽게 나의 시선이 만례씨 엄지손가락으로 향한다.
나 때문에 구역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정신이 없어서 못 붙인 것인지, 아니면 뜯어버린 것인지 금요일이면 늘 붙여서 일요일에 교회를 갔다가 오면 뜯어내던 하얀 면반창고가 만례씨의 한마디 잘려나간 엄지손가락에 없다.
‘똑 똑.’
귓가에 빗방울이 처마 끝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닭이 운다. 그 틈에 또 잠이 들었었구나. 새벽예배에 다녀온 만례씨가 부지런히 쌀죽을 쒀놓고 칼질하는 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내가 좋아하는 나박김치를 눈 깜짝할 사이에 배를 잔뜩 넣고 만든다.
“괴추개루 한나 읍씨 멀겋게 해쓴께 몰국이라도 같이 떠묵어라이.”
“알았다이. 싸게 싸게 댕겨오소.”
“상이랑 치울 생각 하덜 말고 뺏깐 옆짝에로 뽀짝 붙여만나라이.”
아침 일찍 밭에 들렸다가 오늘 장날이라 장에 가서 꼭 사야 할 것 있다며 부산스럽다.
“죽이랑 물도 싸게 싸게 묵어블믄 체항께 찬찬히 묵어라이. 나가 을매나 놀랬능가 여적 가심이 벌렁벌렁 하단마다.”
만례씨 마음은 이미 밭에 가 있을 텐데 시든 풀 마냥 쪼그라져서 누워있는 내가 못 미더운지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밭에 가지 못하고 이런저런 단도리를 한다.
“할머이, 나 인자 암시랑토 안항께 그만 머시락하고 얼렁 밭에 가서 일해라잉. 장에도 가야된담서”
삐그덕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히더니 몇 분이나 지났을까? 기울어진 현관문이 끼리릭 소리를 내며 다시 열린다.
“어제 구역예배 강께 쌀집 이집사가 니 도라고 튀밥 쪼까 주드라.”
“나코 묵으께. 나코.”
“쩌짝에다가 뒀은께 묵고자프믄 갔다묵어라이. 게워내서 속 베려블고나믄 쌀튀밥이 질로 조타든만”
“할머이 그래갔고 오늘 안짝시로 밭에 가겄능가? 고만허고 얼렁가랑깨 비할차 오고마는!”
드디어 만례씨가 밭으로 간다. 달큼한 쌀죽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자 속이 잔잔하게 울렁거린다. 한 숟가락 입으로 가져간다.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세 숟가락을 마저 먹지 못하고 김치 국물을 떠서 입속으로 가져간다. 짜다. 달다. 짜다. 달다. 달다. 달다.
약기운 때문인지 먹은 것이 없어서 기력이 없는 것인지 잠이 들었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반나절이 지나간다. 귓가에 시계 초침 소리가 ‘틱 틱 틱 틱.’ 유난히도 까칠하게 들려온다.
방에서 나와 거실 미닫이문을 열어놓고 밖을 하염없이 내다본다. 눈이 자꾸만 감긴다. 비는 계속 오는데 땅은 젖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금씩만 내려온다. 슬레이트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옆통수가 울린다.
‘끼리리익’
대문 대신 세워 놓은 녹슬어진 철판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만례씨가 장에 갔다가 집에 왔나 보다. 만례씨 몸보다 더 큰 쌀튀밥 포대를 머리에 이고 손에는 정체 모를 것이 들어있는 검정봉지를 들고 만례씨가 돌아왔다.
어디서 들었는지 해열과 장염에 느릅나무차가 좋다고 했다며 장에 가서 느릅나무껍질을 잔뜩 사들고 와서는 주전자에 한 솥 끓여 놓고 내 머리맡에 물통과 밥그릇을 가져다 둔다. 구수한 보리차와는 다르게 쌉싸름한 향이 더해져 습기와 함께 방 안을 채우며 동동동 떠다닌다. 만례씨의 찬송소리도 함께 동동동 떠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