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수야 녹지마.
너와 나는 ‘비전을 위한 기도’를 주제로 한 청소년 여름캠프에서 만났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싸 of 아싸를(가장한 문제아-세상이 보는 시선으로) 위한 연합캠프였다.
그 무렵 나는 3개월이 넘도록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책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캠프에 참석하기를 간곡히 사정하셨고, 그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등 떠밀리듯이 참석하게 되었다.
캠프는 전국 각지 소규모 교회에서 대략 400여 명이 참석했는데 그중에 8-90%가 남학생이었다. 30개 조로 각조에 12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너와 나는 같은 조로 편성되었다. 우리 조는 나를 포함해 여학생 2명, 남학생 10명이었다.
알록달록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 틈에서, 나는 무채색에 존재감도 거의 없었다. 베이비 펌이 참 잘 어울리는 너는 또래에 비해 굉장히 체구가 컸다. 2year, 2baby, 美친year, 아이-신발 욕이 난무하는 질풍노도의 18살의 남학생들 사이에서 너는 굉장히 과묵했다.
첫 번째 시간에 조이름과 조별구호(조가 겸 율동)를 정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우승한 3팀은 조원 모두에게 문상 1만원권과 마지막 날 수제 팥빙수가 간식으로 나간다고 했다. 그럼 뭐 하나? 누구 하나 관심도 없고 집단적 독백만 계속되고 있었다.
분명히 우리는 모국어가 같은데 도대체 Why? 우리는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되고 있는 걸까요? 왜 이러는 걸까요? 나는 주어진 일은 쌍불을 켜고 무조건 해야 되는 강박증 소유자라, 욕 배틀을 배경음악 삼아 혼자서 조이름과 조별구호를 만들었다.
수련회 주제가 비전을 위한 기도니깐 ‘비전을 행하는 기도’의 앞 글자를 따서 ‘비행기’ 조로 하면 되겠네. 그리고 조가는 ‘비행기 노래 부르고 마지막에’ 비전! 행함! 기도! 비행기조 날아가 보자!!
“저기 조이름하고 조별구호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리고 조가 부를 때 누군가 한 명이 가운데에서 양팔 벌리고 비행기처럼 날아다니면 좋겠는데......”
“내가 할게. 설명해 주면 그대로 할게.”
너는 유일하게 나의 말이 귀로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우리 조는 상당한 표차이로 조이름(그 외 조이름:살려조, 구해조, 밥조, 선택해조, 미쳤조, 아름답조 등등) 미션에서 우승을 하게 되었고, 문화상품권과 함께 팥빙수 간식을 거머쥐게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둡던 너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캠프 마지막 날에는 조원들이 그나마 조금 가까워졌다. 아닌가? 난 누구? 여긴 어디? 외국인과 의사소통하는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대화가 살짝 가능해졌다고나 할까? 마지막 순서인 아이스브레이크 타임을 할 즈음에는 그래! 이게 바로 사람의 대화야!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아이스브레이크 타임 내용은 페이퍼에 적힌 5가지 질문에 답을 적고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왼쪽에 있는 사람에게 2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말해주는(오글거리는) 시간이었다.
18색크레파스, 졸라맨깨끗해, 씨발라먹는수박, 개아기신발 또 한 번 욕 배틀전이 열리더니 종이 페이퍼들이 마구 구겨져서 날아다녔다. 멀쩡한 종이는 나랑 너밖에 없었다.
(김준영)-너의 페이퍼
가장듣기싫은말 : 밥 좀 그만 쳐 먹어.
가장듣고싶은말 : 잘했어. 잘할 거야.
가장싫어하는사람 : 욕하는 사람
가장좋아하는음식 : 팥빙수
가장이루고싶은꿈 : 기타리스트
(세희)-나의 페이퍼
가장듣기싫은말 : 너는 목사딸이 왜 그러니?
가장듣고싶은말 : 그래도 괜찮아.
가장싫어하는사람 : 거짓말하는 사람
가장좋아하는음식 : 찐옥수수
가장이루고싶은꿈 : CCM가수
팥빙수 때문에 그렇게 좋아했던 거구나. 너 기타 엄청 잘 치나 보다? 우와 대단하다. 잘했네. 잘할 거야. 아... 그랬구나. 아버지가 너무 하셨네. 그렇다고 어떻게 기타를 부숴 버리시냐. 진짜 속상했겠다. 그럴래? 그럼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을래? 내 번호는 이거야. 내가 문자 보낼게. 내가 팥빙수 2개 받아서 가지고 갈 테니깐 먼저 가있어. 아 그래? 그럼 초코시럽은 빼고 연유만 넣어 달라고 할게.
캠프카페에서 팥빙수를 받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하나는 초코시럽은 빼고, 연유만 넣어 주세요. 연유만 넣어 주시라고요. 아니요. 연 유 만 쳐 주 세 요.”
나는 너에게 한 손으로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드디어 팥빙수를 받아서 양손에 들고 식당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 자리에는 덩그러니 식판 2개만 남겨져 있었다. 수북하게 밥이 쌓인 식판을 보니 이 자리가 맞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넌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삐,’
나는 너에게 보낸 문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는 너에게 연락했지만 너는 나를 블락했더라.
(하상욱-시밤 인용)
나는 힘이 빠져 스르륵 식당 의자에 앉았다. 밥도.. 팥빙수도… 먹지 못하고, 녹아가는 팥빙수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머릿속에서는 네가 학교 축제에서 멋지게 기타로 연주했다던 윤종신의 팥빙수 노래가 하염없이 하염없이 들려왔다.
준영아. 너는 결국 네가 원하는 뮤지션의 삶을 살고 있구나. 가끔씩 너의 밴드음악 찾아서 잘 듣고 있어.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지 못했어.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보려고 해. 내가 그 길을 가다가 너와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내가 네 이름 부를게. 우리 그때 만나서 같이 팥빙수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