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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새 Oct 03. 2022

13. 잠시만요... 휴.. 휴가요?

"나 결혼해요~ 선생님 그래서 4월에 결혼 휴가 가요~"

"축하드려요..잠시만요 휴....휴..가요?"


3월의 어느 좋은 날 아주 평범한 그 날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 파트너선생님이 결혼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로인해 4월에 휴가를..일주일 가신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임용된지 1달도 안된 나에게 파트너 선생님이 안계신 우리반? 감히 상상조차 못했다. 혼자 반을 끌어가야하고 어머님들이 그사이에 상담을 요청하면 상담을 해야하고 만에 하나 아이들이 다치면?? 수많은 걱정과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너무 걱정하지 마요 잘 할거에요!!"


파트너 선생님이 웃으며 이야기해주셨지만 전~~~혀 위로가 안되었다. 처음으로 내 폰에 D- **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하물며 수능볼 때조차 디데이 설정을 안한 나였는데 파트너 선생님의 휴가에 디데이를 설정했다 .


디데이가 다가올 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루 일과를 겨우 익혔는데 활동을 하고 일지를 쓰고 알림장을 적고 애들을 재우고...머리 속에 까마득했다.


그렇게 D-3 , 2이 지나고 D-1이 되었다. 나는 머리속으로 하루 일과를 시뮬레이션 돌리도 또 돌렸다. 애들을 어떻게 주의집중 시킬지 어떻게 일과와 활동을 운영할지 변수는 없는지 아이들이 다친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등등을 머리 속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마침내 디데이 정말 어린이집에 일하러 가는게 싫었다. 혼자 감당해야한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나를 내리 눌렀다. 나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내가 활동할 때 놓친 부분을 없는지 반에 동선을 잘되는지 이것 저것을 확인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내 MBTI를 생각하면


'J네 확신의 J'


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확신의 P였다. 즉흥의 끝판왕이었다. 혼자 경주여행 갈때는 왕복 버스표와 숙소 몇박 며칠 잘지만 정하고 아무것도 안정하고 갈 정도의 극강의 P가 나였다.


그런 내가 저렇게 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나는 매우 절실하고 긴장하고 무서웠다. 그래서 거의 1분 단위로 할 일을 적어놓고 그것을 반복해서 봤었다.


'띵동'


인터폰 벨이 울렸다. 반에 대체 선생님이 오셨지만 사실 그분에게 우리반 아이들의 등원을 부탁드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파트너 선생님이 없는 일주일 내내 힘들텐데 적어도 등원할때는 익숙한 내 얼굴을 보며 즐겁게 시작하길 바랐다. (이건 이후에 다른 반을 맡을때도 습관이 되어서 파트너 선생님이 휴가가면 등원은 무조건 담임인 내가 했다 )


그렇게 아이들이 하나 둘 등원했다. 쌍둥이들은 낯을 많이 가려서 사실 나와 파트너 선생님 둘이 있으면 내가 아닌 파트너 선생님에게 가곤했는데 대체 선생님이 오자 나에게 달려왔다. 우리반 아이들이 다 낯을 워낙 가려서 대체 선생님과 대치한 상태로 내 주변에 둘러 앉아 울었다.


꼭 '선생님 저기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 '라고 하는 거 같았다. 대체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가지 않았기에 10명의 아이들을 케어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대체 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셔서 어떻게 해서든 나를 도와주시려고 노력하셨으나 아이들이 곁을 주지 않았다. (이 대체 선생님이 너무 좋은 분이라는 것은 이후 대체 선생님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결국 대체 선생님은 반에 활동이나 청소 기저귀 갈기 등 생활에 기본적인 것들을 보조해주시고 아이들을 안고 달래고 하는 모든 일은 내가 했다.


그랬더니 온 몸이 평소보다 20배 이상 아니 100배 이상 지치고 힘들었다. 평소에는 5명씩 나눠서 보던 아이..아니 내가 3명 파트너 선생님이 7명 보던 아이들을 나 혼자 보려니 힘들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특히나 낮잠시간에 낯을 가렸는데 잠을 잘 자지 않는 아이들이 새로운 사람이 있으니 더 안자고 내 손길이 없으면 아예 눈을 감으려고 조차 안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 양 쪽에 한명씩 아이들을 눕히고 손으로 토닥여 주면서 다리를 피고 그 위에 두 명의 아이를 앉혔다. 그렇게 4명을 한 번에 달랬다. 잘자는 2명 아이들을 제외하고 남은 4명은 낮잠 노래에 그 아이들 이름을 넣어부르며 재웠다. 토닥이고 무릎에 앉힌 아이들이 잠들거나 진정되면 다른 아이들의 이불을 끌고 와 재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그나마 숨이라도 조금 돌리는 낮잠 시간조차 쉴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때보다는 나아서 아이들을 그렇게까지 끼고 있지 않아도 아이들이 잘 적응하도록 하겠지만 당시에 나는 그렇지 않았다. 요령이나 기술 없이 생으로 아이들을 달래고 안아주었다 .


그렇게 어떻게 갔는지 모를 5일이 지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 기억이 잘 안난다 왜냐 너무나 긴장한 상태에 하루 종일 피로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5일 후 주말 나는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하루 종일 이불 위에 누워 끙끙 앓았다. 잠을 자며 끙끙 앓고 열이 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 인간이 너무 긴장하다가 그게 풀리면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4월의 힘들었던 한 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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