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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식이 Mar 12. 2016

아흔살에 이러시기 있기없기

Sue



        역시 시작은 Sue 할머니 이야기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에 한 번씩은 튀어나올 거거든요. 올해 90세가 된 Sue는 밴쿠버에서 나고 자란 캐네디언이지만, 그 시절 방과 후 일본어 학교 열심히 다닌 덕에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 일본어에도 능숙해서 요양원 내 캐네디언들과 일본인들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는 할머니입니다. 매일 매일 신문을 읽고, 크로스워드를 즐겨하며, 요양원 안팎의 대소사 일에 꼭꼭 참여하는, 소박하지만 그날 그날의 패션에 맞는 브로치라던가 스카프, 목걸 여주는 센스가 만만치 않은 멋쟁이 할머니에요. 비록 요양원에서 외출을 하는 일이 한 달에 손에 꼽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 커뮤니티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반응하죠. 어느날은 “어젯밤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두 편 연달아 봤는~” 하고 말을 꺼내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할머니들 사이에서 Sue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무슨 영화?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응 있어요, Revenant랑 Deadpool이라고. 당연히 모르겠지 하는 말투로 대답하는 나에게 그녀는 주인공이 기어 나오는 듯한 모션을 취하며 레버넌트! 하고는, 신나게 오스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또 한번 놀랐습니다. 90살의 할머니가 어쩜 이리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무엇 하나 빼놓는 것 없이 다 알고 있을까 하고요.


       무엇보다도 프로그램을 진행함에 있어 Sue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데요. 사실 오늘의 뉴스라든지 단어 게임같이 뭔가 머리를 조금 써야 하는 액티비티를 하면 다들 졸기도 많이 조시고, 잘 못 따라 오세요. 귀도 눈도 고장이 나서 알아듣기가 힘든 탓이겠지요. 퀴즈를 내거나 하면 다들 얼굴에 여보소 슨상 내가 이 나이에 고시를 보나. 아니 왜 이딴 걸. 하고 생각하는 게 읽힐 정도 인데 그렇다고 할머니들 좋아하시는 빙고만 맨날 하면 안 되고 이런 Intellectual 한 프로그램도 해야 하므로, 억지로 억지로 온몸으로 할머니들의 관심을 끌어보고자, 정말 온몸으로 오버 액션을 해가며, 땀을 뻘뻘 흘리며 프로그램을 끌고 나가는데 그럴 때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Sue할머니 입니다. 방청객마냥 물개박수 치면서 웃어주고, 대답해주고, 분위기 선동해주고. 할머니들은 대개 덩달이들이라 누구 하나가 웃기 시작하면 그럼 다들 또, 와 뭐 재미있는 얘기 하나보다 하고 따라서 와하하하하 웃으시거든요. 또 한번 그렇게 프로그램이 즐겁게 끝이 나고요. 정말 없어서는 안될 존재에요.


        그리고 그녀의 존재감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듯, 찾아오는 봉사자분들, 특히 말씀을 전하러 오시는 기독교 목사님들, 불교 스님들, 천주교 수녀님들께서 그녀를 많이 찾으십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반갑게 맞이하고, 중간 줄 즈음에 앉아 설교를 듣고, 좋은 말씀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모두를 환영받는 기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고 아드님은 목사님이세요.) 스탭이나 봉사자들이 새로 와도 별 관심 없어하는 다른 거주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눕니다. 누구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보이고, 질문을 하고 즐거워하세요. 항상 바쁘게 움직이고 무슨 일이든 즐겁게 받아들이고요. 사실 나부터도 일을 하다 보면, 이름은 잘 모르고 그냥 안면만 있어, 특별히 이름을 알려는 노력 없이, 저기요, 여기요, 등으로 얼버무릴 때가 많은데 말입니다. 반성할 일입니다.


        또한 그녀는 마치 부녀회장처럼 이 널싱홈에 거주하는 25인의 일본인들의 이름, 나이, 전 직업, 출신, 가족관계 등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냥 뭐든 질문이 있을 때 그녀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옵니다. 여기 좁은 일본인들의 커뮤니티 특성상 다들 친척에 사돈에 팔촌에 한 다리 건너 한 다리여서 나는 정말 헷갈리는데 그녀는 그 네트워크를 정확히 다 알고 있으니, 정말 엄지 척!이 절로 나와요. 심지어 다른 거주자들의 가족들도 뭔가 일이 생겼을 때 스탭에게 전화하기보다 Sue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니 우리 엄마에게 좀 전달해줘 라고 부탁하기도 한답니다. 밴쿠버에서도 텍사스, 플로리다에서도 연락이 오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녀가 일본어도 영어도 능숙하기 때문이겠지만, 그만큼 모두 그녀를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서당개 3년차가 그랬듯, 몇 년째 할머니들의 똥강아지 역할을 하고 있는 나도 열심히 풍월을 읊습니다. 마치 인생에 해탈을 한 듯 건방지게 환갑 넘으신 아빠와의 통화에서, 아부지 내가 살아보니까 말야 라든지, 아부지 인생이란 말이야 라든지의 말을 해대곤 합니다. 하지만 실로 매일 꼬꼬 할머니, 꼬꼬 할아버지들과 지내다 보면, 나 역시 인생을 초월한 듯한 마음가짐이 되기도 하고, 또 '90살의 나', '노년의 나'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지 않는 굽어진 몸뚱이, 마디마디 아픈 손가락, 뿌옇게 보이지 않는 눈, 들리지 않는 귀, 그리고 자꾸만 끊어지는 기억,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순간들. 그런 우울하고, 서글프고, 두려운 세상을 나 또한 언젠가 맞이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도 하기 싫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끝자락의 인생길에서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Sue는 그 가운데서도 누구보다도 유쾌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늙어가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나의 90살 롤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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