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이 거듭되면서 확실히 상태가 나아짐을 느낀다. 다녀오면 정신력이 바닥나는 것 같지만, 다음날에는 그 총량이 늘어나는 기분이다. 마치 운동을 하면 당장은 힘들지만, 멀리 보면 체력이 늘어나는 것과도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감정을 수용받는 경험이 좋다. 책과 유튜브에서 간접적으로 듣는 것과, 눈앞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말하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는 표현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수용만 하는 시간은 아니다. 가끔 상담사 선생님이 던져주시는 화두는, 다음 만남이 있기까지 생각 속에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렇게 들었던 지난 두 번의 질문은 '나답지 않은데요?'와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요?'였다.
'나답지 않다'는 말이 나온 까닭은, 복직을 하면 내가 어떤 업무도 제대로 해낼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을 토로할 때 들었다. 지금도 동기들이 하는 업무를 들으면 '저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먼저 올라온다. '일단은 해 보자'는 신념으로 살았던 과거에는 전혀 가지지 않았던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드문 드문 김기림 시인의 작품 <바다와 나비>를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청무우밭인 지 바다인지 모르니까 일단 가보자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물결에 절어버렸기에 다시 날개를 펴기가 두렵다.
선생님은 지금의 두려움은 두 가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나는 내가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인지와, 다른 하나는 업무들이 가지는 본질이다. 첫 번째는 지기(知己), 두 번째는 지피(知彼)에 대한 것이다. 우선 함께 나의 모습을 파고들어 갔다.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이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납득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일이 즐거웠던 것은 일을 하는 이유를 납득했기 때문이며, 금요일 밤부터 출근이 두려웠던 것은 업무에 대해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도전을 하기 전에는 항상 이유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고민을 하다가 납득이 되면, 그때부터는 뒤를 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방법도 나왔다.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을 납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일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일에 대한 부분은 상담으로 해결할 수 없다. 조금씩 고민해 보며 그 답을 구하고 있다. 아마 100%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이해한다고 해도 100%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사업을 하지 않는 이상 조직의 섭리는 개인과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납득의 %는 따질 수 있고, 남은 부분을 어떻게 채울지 혹은 내버려 둘지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내가 닥친 일에 전력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투자의 정도를 결정하는 진정한 워라밸을 생각할 때다.
생각을 확장시키고 보니, '너의 과거 성과는 무의미하고, 너는 지금 부족하며, 힘들지만 이겨내야 한다'라고 들었던 말이 얼마나 나쁜 가스라이팅인지를 알게 되었다. 무엇이 부족한지, 왜 이겨내야 한지를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다그치는 말에 내심 스스스로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남들이 하기 힘든 성과를 만들어냈고, 처음 하는지라 몰랐을 뿐이며, 이겨낼지 말지는 내가 정할 것이다. 무의식에서 계속 맞는 말이라고 괴롭힐 것이니, 의식의 영역에서 반격에 나서야겠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아 중심을 굳건히 세울 때, 손자병법의 말처럼 비로소 백전불태(百戰不殆) 할 수 있을 것이다.
<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다른 하나의 이야기. 왜 도움을 청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상담이 한 주 연기되는 바람에 다음 주를 기다려야겠다. 내가 가진 또 다른 내면의 무언가를 탐구할 차례다. 어쩌면 지난번에 올린 글처럼, 내 인생에 악영향을 미친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또 올릴지도 모르겠다. 아마 올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