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초코숲 Mar 07. 2023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한 10년 만의 재심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달과 6펜스>에 대한 감상을 찾아보면 대부분 속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나아갔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한 찬사 혹은 부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달은 이상을, 6펜스는 세속을 상징한다는 것도 책을 읽고 조금만 검색을 하면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나 2014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낸 까닭은 스트릭랜드가 끼친 사회에 대한 해악을 이제는 이해, 아니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스트릭랜드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보란 듯이 벗어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궁핍한 삶을 동료 화가 스트로브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감사는 커녕 무관심과 무례한 모습뿐이다. 끌림 때문에 남편을 버린 블란치 스트로브와 스트릭랜드의 일화를 보고 있으면, 그가 어떤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쾌한 감정이 앞섰다. 


민음사 판 뒤쪽에 수록된 작품 해설에는 나처럼 책을 읽은 이들을 향해 친절한 설명이 있다. 비록 세상의 윤리로 보면 그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이지만, 스트릭랜드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윤리라고 부르는 '위선'들을 초월한 진정한 양심을 따랐다는 것이다. "당신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비난에 "당신이 정말 블란치 스트로브의 생사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고 있긴 하오?"라고 되묻는 것은 이를 전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의 나는 결코 스트릭랜드를 용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학 수업을 들으며 사회계약론에 흠뻑 빠져 있는 시기였기에, 스트릭랜드의 모습은 암묵적인 계약으로 유지되는 사회를 파괴하는 행위로 보였다. 이를 테면 '우리라고 너처럼 하고 싶지 않겠냐, 어쩔 수 없이 사회를 위해 조금씩 참는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남들은 윤리라는 족쇄를 차고 망설이는 영역을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스트릭랜드의 행동을 보며, 나는 그를 '사회계약의 무임승차자'라고 생각했다. 


10년이 지났다. 아직도 스트릭랜드처럼 사는 사람이 많다면 사회가 유지되지 못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변한 것은 사람들이 스트릭랜드처럼 '안'사는 것이 아닌 '못'사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스트릭랜드를 변호하는 많은 의견들이 훨씬 더 호소력 있게 들렸다. 그는 세상 일에 타협하지 않았지만, 타인에게 직접적인 해악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와 함께해서 불행해진 모든 사람들도 결국 그 불행을 자신들이 선택한 결과라는 스트릭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제 제목의 의미가 뚜렷하게 보인다. 우리들 대부분은 6펜스라는 세속의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그걸 뛰어넘어 달로 향하고 있음을. 차원이 다르기에 이해조차 할 수 없음을. 사회계약도 6펜스의 영역이니, 달을 쫓는 사람들이 많으면 당연히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임을.


책을 처음 읽었던 시절을 다시 돌이켜본다. 학교와 사회가 가라고 말했던 길을 별생각 없이 따르던, 그리고 그 길은 '선한 방향'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그 선의 길에 대항하는 스트릭랜드는 악이었다. 이제는 그 길이 결코 '선한 방향'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외침처럼 누군가의 불행에 관심이 있는 척만 하는 '위선'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불쾌한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위대한 인간이었다는 책의 표현에 공감한다. 개인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사회의 규칙과 압력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갔다는 사실이 이제는 보다 나쁘지 않게 보인다. 내가 이해를 하건 용서를 하건 스트릭랜드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내가 그를 이제 이해한다는 사실은 나의 양심과 나의 삶을 찾는 데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꿈에서 함께한 수탐자들과의 여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