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WBC 참사를 바라보며
충격적인 2023년 WBC 결과. 2승 2패, 조 3위로 1라운드 탈락이라는 표면적인 성과도 문제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실망스럽다. 세미프로로 구성된 호주전 패배는 물론, 콜드게임을 겨우 면할 정도로 수준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일전은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보는 사람이 힘들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후폭풍으로 여러 가지 비판과 해결책이 속속 등장하는 가운데, 한화 이글스의 외국인 감독 수베로의 인터뷰에 눈길이 갔다. '상자를 찢자'라는 헤드라인 아래 그가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링크)
“한국에 온 첫날부터 바뀌지 않은 생각이 하나 있다. 한국 선수들이 상자 안에서만 자신의 기량을 뽐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선수들에게 ‘상식적인 야구만 하자 말자’고 항상 장려하곤 한다. 어렸을 때 배워온 포구 자세로만 하려다 보니 더블 플레이를 놓치기도 한다”라고 하나의 예를 들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라는 문장으로 함축될 수 있는 수베로 감독의 말이 인상적인 이유는, 과연 이 문제가 야구에만 국한되는 일일까 의심이 되어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오면서 우리 사회가 보수적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 정치적 관점으로 보는 진보/보수 개념이 아니다. 위험회피적인 성향이 아주 강하다는 의미다. 어른들이 그렇게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실패라는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믿어서다.
거창하고 중요한 부분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다.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체감상 한국 게이머들은 외국 게이머들에 비해 '공략'과 '최적화'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수학 공식을 푸는 것처럼 레벨 10일 때 능력치를 어떻게 찍고, 무슨 사냥터를 가서 레벨을 15까지 올리는 식으로 말이다. 당장 롤 리그에서 색다른 전략을 쓰다가 지면 '왜 이상한 짓을 했냐'는 식의 악플로 도배가 된다. 우리는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방향성이 어떻게든 위험을 줄이려고 하고 있다. 물론 위험 회피 성향은 인간의 본성이긴 하나, 우리나라는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심하다는 점이다.
개인보다는 공동체 중심의 문화, 창의력이 필요 없는 페스트팔로워 전략으로 국가가 성장한 점, IMF이후에 사회 불안정이 커졌다는 점 등 불확실성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많다. 그런데 미래에도 지금의 전략이 통할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우리나라 사례를 떠나 이번 WBC의 가장 큰 특징이 야구의 평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에서 열린 A조의 경우에는 5팀이 모두 2승 2패를 기록하는 일이 생겼다. 비록 야구가 단판경기의 변수가 큰 편이긴 하지만, 과거였으면 신경도 안 썼을 팀들도 이제는 못할 수 없는 전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비슷비슷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운이나 특별한 에이스의 존재가 없는 다음에야 좋은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부족한 양적 인프라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질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수라는 점이다. 이번 참사에 대해 야구인프라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교야구팀 숫자가 우리나라는 50개 남짓인데, 일본은 4000개가 넘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우리나라 고교팀을 4000개로 늘려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20배 많은 나라와 똑같은 생각, 똑같은 훈련을 한다면?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 20배 많은 나라와 똑같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에 끊임없이 부딪히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먼저 찾아내는 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번 WBC로 분명해진 것은, 그동안 선수들이 믿고 있었던 우리나라 야구'상식'이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상식을 바꿔야 한다. 상자를 찢고 나와 새로운 생각을 해야만 다음 대회에서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상자를 찢어낼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을 가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도 생길 것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는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는 그 실패와 비효율을 성공을 위한 밑거름으로 인정해야 한다. 말로만 접시를 깨도 된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접시를 깨버리더라도 안심할 수 있도록 사회구조와 의식을 바꿔야 한다. 힘든 일이지만, 자원도 없고 인구도 줄어가는 이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모든 분야에서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