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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Sep 24. 2022

행운이 아닌 행복을 택한 사람들

무계획으로 들린 제주도 송당마을 예찬

지난주 다녀온 제주 여행은 속에 있던 P성향을 극한으로 발휘하는 무대였다. 숙소와 항공편 이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떠났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음식을 검색하고, 배가 부르면 주변에 있는 카페나 오름으로 향했다. 제주도니까,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섬이라는 생각 덕분에 크게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렌터카를 타고 서귀포를 향해 달렸다. 벌써 시간이 오후 2시다. 첫 끼로 무엇을 영접할지 고민했다. 마침 주변을 보니 청와대 출신 셰프가 요리하는 음식점이 있었다. 정갈하고 깔끔한 맛의 비빔밥으로 유명한 '상춘재', 명성에 걸맞게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대기줄이 길었다.

밥을 먹었으니 카페로 향하는 것이 여행지에서의 국룰이다. '카페' 두 단어를 스마트폰에 입력했다. 어색한 4글자가 보인다 '블루보틀'?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그 유명한 블루보틀의 제주점이 있었다. 게다가, 커피 말고도 제주도의 힙한 먹거리들을 한곳에서 즐길 수 있었다. 우무 푸딩도, 제주 맥주와의 콜라보 제품도 한 번에 맛볼 수 있었다.



여행하고 있는 이 한라산 중턱의 지역을 '중간산'이라고 한다. 보통 제주도를 생각하면 탁 트인 에메랄드빛 바다를 떠올린다. 바다도 좋지만, 우뚝 솟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넓은 평원과 오름, 나무들이 맞이하는 중간산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제주도 이곳저곳에 존재하는 독립서점과 소품샵을 찾아보았다. 마침 여러 소품샵이 모여 있는 '송당'이라는 지명을 발견했다. 역시 차로 불과 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궁금해 잠깐 검색해보았다. 마을에 소나무와 신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 18,000 신들의 어머니인 금 백조 신화가 있어, 소원 비는 마을이 송당의 캐치프레이즈라고 한다. (송당마을 설명 출처 : visit JEJU) 


마을에 도착하자, 아기자기한 편집샵들이 골목마다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그런데 육지의 다른 가게들과는 조금 다른 아우라가 느껴진다. 손님들이 구경하면 주인은 구매욕을 자극하기 위해 열심히 세일즈를 하기 마련인데, 이 동네 가게 주인들은 그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배려일까, 무심함일까. 극강의 내향성 때문에 점원이 다가오면 물건을 고르기 힘들어하는 나에게는 오히려 배려로 느껴졌다. 많은 굿즈 중에서도 남미 느낌이 물씬 나는 아이템들이 주로 눈에 띄었다. 프리다 칼로와 파타고니아 굿즈들은 거의 모든 가게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길을 계속 걸어가며 제주의 돌담과 건물들을 만끽했다. 괜히 삼다도라고 하는 게 아닌 듯 바람이 강하게 불고, 비는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다. 추석 연휴 직후라 그런지 잠시 육지를 방문하기 위해 문을 잠근 가게들이 많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길을 가다가, 어디서 많이 보던 건물을 하나 발견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왔던 행복국수가 보였다! 그런데 드라마 촬영지 치고 너무 조용한 것이 수상했다. 잠시 후, 주인아주머니가 마당 청소를 하러 나오시는 것을 목격했다. '그 국숫집'이 맞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천리식당이라는, 해물을 활용한 제주도 가정식을 판매하는 가게라고 한다. 그러던 중 드라마 촬영을 위해 행복국수로 꾸며진 외관을 그대로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원에 있다는 '우영우 김밥'건물에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는 것을 알기에, 굴러들어 온 행운이라는 생각에 즐거워졌다. 그런데 주인 어르신은 이 엄청난 행운을 굳이 활용하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용한 마을에서도 외곽에 홀로 떨어진 곳이다. 욕심이 있으셨다면 하다 못해 '우영우 행복국수 촬영지'라는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웠을 것이다. 더 욕심을 내보면, 아예 가게에서도 국수를 팔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행복국수라는 외관을 가지고 있는 '천리 식당'은 여전히 갈치조림과 옥돔구이를 팔고 있었다.


그들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송당마을 주민들이 가진 삶의 태도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큰돈을 벌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행운'보다, 자기 자리에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언젠가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 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라는 책에서 보았던, 자본주의의 때가 묻지 않은 라다크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느낀 기분이었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 여러 가지 행운이 함께 하고 있었다. 유명한 밥집과 카페,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갔으니까. 그렇지만 진정한 행운은, 마을 주민들의 삶에서 행복이라는 가치를 찾아낸 것이다. 하루하루에 충실한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작지만 분명한 진리.  제주는 바다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행운'이었고, 작은 마을의 모습에서 찾아낸 '행복'이다. 


송강 마을 사람들의 행복한 삶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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