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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Dec 26. 2022

마음에 발자국이 남지 않길 바라서

회피에 대한 긴 변명

오전에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스팸이 아니라 주소록에 등록된 번호로 온 것이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니 곧 웅웅 거리던 휴대폰이 얌전해진다. 이내 '전화 가능하실 때 연락 바랍니다'라는 정중한 카톡이 들어왔다. 번호의 주인은 바뀌기 전 부서에서 자주 미팅했던 파트너사 담당자였다. 최근 목록을 열고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 마음의 준비를 끝내는 데 30분이 걸렸다. 예상했지만 전혀 내가 마음을 쓸 일은 없었다. 간단한 안부와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으로 족했다.


오후에는 함께 일하던 다른 직원분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2통으로 나뉘었기에 내용을 미리 전부 볼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지난번에 '올해는 없어서 좋다'라고 했던 송년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민 끝에 다른 일정이 있어 참석이 어렵다는 답장을 보냈다.


전화도 카톡도 잘 받지 않고, 약속도 안 나가는 것. 다른 말을 할 것 없이 '회피'다. 오늘 있었던 두 연락에 대해 머리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아직은 교류할 때가 아니다'는 감정이 계속해서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어설프게 다시 교류를 시작하다가 생길 상처. 그 상처를 아직 감내할 용기가 부족하다.


무너진 마음의 집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은 강력한 보강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위 변화에 예민하고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스스로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약함을 보강하기 위한 다른 형태의 노력이다.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 요가, 명상이 그렇다. 마치 건물에 시멘트를 바르는 것처럼, 쓰러지기 쉬운 마음 주위를 둘러 튼튼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하지만 시멘트를 바른다고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굳어짐을 기다리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유치원을 다닐 때 보았던, 길 한편에 선명하게 찍힌 신발자국이 생각난다. 길가에 부어놓은 시멘트를 누가 밟았던 발자국.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그 길이 사라지기 전까지, 수년간 같은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 아직 내 마음에 둘러친 시멘트는 너무나 말랑말랑하다. 물을 많이 섞어서 그런지, 아니면 많이 부어서 굳혀야 하는지, 튼튼해지려면 오래 걸릴 것만 같다. 혹시나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누군가 다시 괴롭힌다면, 그 자국이 오래도록 남을까 봐 무섭다. 


여기까지가 회피에 대한 변명이다. 훗날 모든 아픔이 진정되고 글을 바라보면, 시멘트라는 비유를 궤변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마음은 회피를 선택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길. 더 이상 밟아도 자국이 생기지 않겠다 확신이 들면, 반드시 이 단절을 끝낼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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