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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Mar 09. 2021

은퇴 예행연습 중입니다.

작년초 파견 갔다 돌아 와서 집에서 3개월 간 재택 근무를 해 보니..

딱 1년 전에는 중국에서 급하게 돌아와서 내내 집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코로나가 가져온 재택. 그 소회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2월이 금방 갑니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네요. 처음에는 중국에서 귀국한 저만 자가 격리해서 평일 낮에 돌아다니면 좀 어색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인 지금은 안전을 위해서 많은 회사들이 재택근무를 시작하거나 권유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집에서 논다고 뭐라고 했을 텐데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한에서 같이 돌아온 동료 분들도 비슷한 상황인데 다들 쉽지 않으신 가 봅니다. SNS에서도 이런저런 경험담들이 나옵니다. 삼시 세끼를 챙겨 주는 것이 너무 힘들 더라는 불평부터, 아이가 있으면 업무인지 육아인지 적응이 어렵다는 말도 많습니다. 같이 낮 시간을 보낸 적이 많지 않은 가족들은 아무래도 어색하겠죠. 어쩌면 은퇴 이후의 생활을 미리 체험해 본 한 달을 보내 면서 느낀 점을 간단히 적어 봅니다.

 

첫째, 재택근무는 선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집은 쉬는 곳, 회사는 일하는 곳인데 집에서 일하면서 과연 내가 일을 하는지 가족과 함께 있는지 그 선이 명확하지 않더군요. 저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들은 평소 주말처럼 저에게 놀아 달라 / 먹을 거 달라 / 궁금한 거 물어보고 / 자기들끼리 싸운 이야기 판단해 달라고 쪼르르 옵니다. 저도 처음에는 전체 보드 미팅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있다가 둘째 아이 목소리가 전 세계로 퍼져서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사장이 그러더군요. 우리 회사에 새로운 멤버가 들어온 것 같다고…



그래도 이건 시간이 좀 지나면 해결이 됩니다. 가족들에게 비록 내가 집에 있지만 업무 하는 시간에는 일하고 있는 중임을 이야기하고 그 걸 존중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진짜 급한 일이 아니면 문을 두드리지도 않아요. 가끔 제가 들어간 구석방에서 뒤 베란다로 연결된 창 밖으로 와서는 소리 없이 “아빠 파이팅”하고 갑니다. 어쨌든 가족이 살아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아빠의 무게를 이해해 준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

 

둘째, 재택근무는 너무 정적입니다. 일단 출근과 퇴근이라는 과정이 없습니다. 조금 늦게 일어나도 되고 퇴근길의 그 지루한 운전도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미팅으로 이 곳 저곳 뛰어가기 일쑤였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PWT동은 본관과 약 100여 미터 떨어져 있었는데 하루에 오전 오후 미팅으로 한 번씩, 밥 먹으러 한 번씩 다녀오고 나면 보통 하루 8000보 정도는 걷습니다. 지지난 주인가요? 집에서 계속된 화상 회의 6 시간하고 피곤해서 밤 10시에 자려고 누우면서 봤더니  애플 워치에 1800보 찍혀 있더군요. 와이프가 그러더군요. 낮에 구석방에 들어가 있다가 밤 되면 나오는 거 보니 “햄스터” 같다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산책을 좀 늘렸습니다. 다행히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중국 / 인도 / 프랑스에 있는 동료들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일단은 업무의 시작이 9시 반 즈음입니다. 그래서 아침 먹고 나면 무조건 집 앞 강변에 가서 한 바퀴 산책합니다. 뭐 농구공 들고나가서 땀을 흘려도 좋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한 회의 마치거나 보고서 마치고 나면, (마치 회사에서 동료들과 커피 한잔 하면서 한 숨 돌리던 것처럼) 집안일을 하든 쓰레기를 버리든 하다 못해 아이들 먹을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러 마실 나갑니다. 그렇게 겨우 짜내서 요즘은 그래도 만보는 채우고 잡니다.

 

그래도, 재택근무는 참 외롭습니다. 물론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들은 그 나름대로 즐겁습니다. 그리고 컴퓨터 저 너머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협업합니다. 그래도 외롭습니다. 그냥 내 고민거리를 나누고 너의 고민거리를 듣고, 시시껄렁한 잡담을 주고받으며 같이 아침 인사를 나누던 동료들과의 교류가 없는 것이 참 적적합니다. 저는 자연이 좋은 외진 곳에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서울에 있어도 혼자 있으면 거기가 섬입니다.

 

그래서 지난주부터 일주일에 한 번은 점심 약속을 잡고 있습니다. 어쨌든 시간은 내가 조율할 수 있는 부분이고, 주요한 회의는 3시부터 8시 정도에 많으니 이 참에 보고 싶은 얼굴들 보러 다니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민도 듣고, 제 고민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오랜만에 후배 영록이랑 만나서 거기 동호회 분들과 함께 심야 농구도 같이 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채워야 할 관계의 양이 있다면, 재택근무에서는 조금 더 능동적으로 찾아봐야 하는 구나하고 느껴집니다.

 

쓰고 보니, 불편한 점들만 쓴 것 같은데 좋은 점도 많습니다. 같이 있을 때 보다 더 많이 Delegation 받아서 조금 더 자율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어서 편합니다. 출퇴근 시간 아낀 만큼 이렇게 글을 쓰거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아이들도 아직 개학 전인데 돌아보면 제 평생에 아이들과 그리고 아내와 이렇게 오래 동안 낮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회의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보고서 작성하고 동안에는 책상 옆에 와서 이런저런 그림 그리고 수학 문제 풀고 그러고 갑니다. 제 영어 발음이 안 좋다고 엄청 비웃기는 합니다만, 아이들에게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참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정말 은퇴 후 삶의 예행연습 같은 느낌이 많이 듭니다. 덕분에 어떻게 하면 그때도 조금 더 명확하고 더 움직이고 더 소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살펴보게 됩니다. 참 다행입니다. 앞으로 파견 업무 역할이 마무리되는 5월까지 천천히 배워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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