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 3
회사에서 지내는 시간을 돌아보면, 정말 회의와 보고서의 연속이다. 학교 다닐 때도 글쓰기 숙제가 제일 싫었고 그래서 이과를 나와서 취직했는데 왠 걸? 회사에서 글쓰기를 이렇게 많이 할 줄이야.
오늘도 지난 한 달간 진행했던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이 팀장에게 보내고 커피 한 잔 하러 사내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나의 영혼과 피땀을 담은 보고서를 내고 났더니 긴장이 확 풀린다. 동기를 만나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났더니 충전이 좀 됐다.
자, 하나 마쳤으니, 다시 일해 볼까 하는데 엇! 보고서 메일이 회신이 와 있네. 불길한데... 아니나 다를까, 깐깐한 이 팀장이 또 반려한 모양이다.
"나민지 연구원.
보고서 잘 보았습니다. 일단 자료 정리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다만, 내용을 봐서는 정확한 진행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회의에서 이야기 한대로 최대한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다시 한번 정리해서 보고 바랍니다."
간단하지만 명확하게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평소에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으니까 이야기를 해 줘도 이해를 못 하는 거지. 도대체 왜 내가 올린 보고서는 늘 반려를 당하는 거야? 가스 라이팅도 아니고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야?
직장인들의 영원한 숙제이자 야근의 근원이 보고서이죠. 단순한 상황 보고에서 기획안도 있고 최종 프로젝트 완료 백서까지 보고서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저도 서른 살 즈음 엔진 시험 진행했던 결과 보고서를 일곱 번 반려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거절당하고 나면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상사에 대해 불신하게 되죠. “실무는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반대만 하는 나쁜 상사”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과정 속에서 많이 배우기도 했지만, 그땐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계속 반려를 당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애초에 그 보고서를 왜 요청받았는지를 먼저 따져 봐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원들은 보고서를 요청받은 이유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에 대해 팀장이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실제 프로젝크에서 문제가 되었던 걸림돌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고생했던 상세한 내용을 구구절절이 나열합니다. 그리고 그걸 알아주길 바라죠.
그러나 상사 입장에서는 그 보고서 결과를 바탕으로 자기도 상부에 보고할 자료를 만들어야 합니다. 팀장에게 보고를 받는 임원들은 실제 현장을 잘 알지 못하고 진행 상의 걸림돌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현업에서 풀어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하니까요. 오히려 중간 보고자 입장에서는 마치 우리 팀의 미숙한 부분이 더 드러나고 Added value 없이 그저 당면한 문제 해결에 급급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줄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공들여 만든 문제 분석이나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나열해 놓은 부분을 보면 답답해합니다. 왜 이런 내용을 넣었어하면서 지우라고 그러죠. 정작 고생한 사원 입장에서는 이런 답답한 팀장을 “현실도 모르고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반려당하고 다시 쓰면 결국 고생하는 건 본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인정 욕구를 잠시 뒤로 보내고 승인권자인 팀장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Always Keep Customer in mind”라는 마케팅 구호는 꼭 Sales 영역에서만 통하는 건 아닙니다. 직장에서 보고서란 업의 실질적인 고객은 팀장이니까요. 팀장들은 보통 보고서를 통해서 다음 세 가지를 원합니다.
1. 자기 팀의 성과를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합니다.
수많은 일들을 했어도 결국 보고서의 핵심은 성과입니다. 애초에 세운 목표를 달성했다는 기본이고 거기에 납기를 단축했다거나 추가적으로 프로세스를 개선했다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거나 금전적인 이득을 가져왔다는 등의 기대 밖의 성과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2. 지난 보고와 일관성을 유지해서 신뢰를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임원들은 사실 수많은 보고를 받습니다. 그래서 전부 파악은 못해도 중요한 사실, 숫자, 계획들에 집중하고 그 걸 토대로 현업들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나 파악합니다. 그러니 오늘 내는 보고서는 늘 지난 마지막 보고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때 하기로 한 일정, 예상했던 성과에서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명확히 하면 좋습니다. 설령 지난 보고에서 잘 못 보고 했었다면 보고서 초반에 그 오류를 솔직히 고백하고 정정하는 것이 나중에 보고하는 자리에서 앞뒤가 맞지 않아 얼굴 붉히는 것보다 훨씬 났습니다.
3.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명확히 하고 싶어 합니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살아 있는 생물과 같습니다. 상황이 계속 변하니 많은 보고서들이 현재 새롭게 발견된 문제에 대해서 상황과 어려워진 정도에 대해서 굉장히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정작 “So What”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팀장 입장에서는 어쩌라는 거냐는 식으로 당황하게 되고 현업에서 문제 해결하느라 싸우는 사이에 어렵게 보고한 아랫사람에게 엉뚱하게 화를 내곤 합니다.
이런 과정이 쌓이면 문제가 있어도 보고하지 않는 악순환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원래 예상했던 계획을 확인하고 현재 발생한 문제로 어떤 조정이 필요한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당장 원인 분석이 안되어서 세부 계획이 어렵다면 “추가 조사를 언제까지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문구 하나만 더해도 훨씬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만두셨지만 저희 회사 CEO께 직접 보고 드리려 간 적이 있습니다. 배기가스 규제와 관련된 복잡한 숫자를 막 나열하고 있는데 씩 하고 웃으시더니 됐다고 하시면서 두 가지만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잘 되고 있는 거야? 잘 될 계획은 있는 거야?”..
“그럼 내가 뭘 해 주면 되냐?”
멋지지 않나요?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믿고 직접 계획을 세워 보라고 위임하고 그렇게 세운 계획을 진행하는데 내가 도와주겠노라 이야기하는 수장 밑에서라면 팀원은 자기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미래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분께 복잡한 숫자는 부수적인 정보일 뿐입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업무의 종류와 보고서의 목적에 따라 다르지만 열심히 쓴 보고서가 반려되는 이유는 대부분,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상대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보고서를 쓰실 때 내가 한 일은 전체 보고서에 20% 이내로 줄이고, 그래서 얻은 성과를 50%로 강조해 보세요. 그리로 남은 30%에는 앞으로의 계획과 필요한 지원을 언급하면 좋습니다.
형태는 글이지만, 사실 보고서는 가장 구체적이고 느리지만 직접적인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의 첫걸음입니다. 신뢰와 위임, 동기부여와 자율성 보장 같은 가치들이 서로 다른 입장 사이에서 교차되죠. 언젠가는 당신도 매니저가 되어 승인하고 반려하게 될 보고서라면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그때가 되면 나는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을까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듣고 싶은 내용을 적어야 한다.
지난 보고서를 기반으로 새로운 변경 내용을 명확히 한다.
내가 한 일은 20%만, 성과와 계획에 더 중점을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