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 2
화창한 오후, 두 시간만 있으면 퇴근 시간이다. 조금 나른해지는 시간이라 정신 차리려고 커피 한잔 타 왔다. 이제 지난번에 재무팀에 요청했던 자료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는 메일 하나 쓰고, 받아서 정리하고 퇴근하면 되겠다.
이런 생각하고 있는데 방금 임원 회의에서 돌아온 팀장이 사내 메신저로 나를 부른다. "나 연구원, 잠시 7 회의실에서 볼까요?". 아. 무슨 일이지?
불안한 마음에 찾아갔더니, 담배 냄새 풍기면서 이 팀장이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다. 그러고는 대뜸 언성을 높인다.
"나 연구원, 오늘 아침에 메일로 보낸 보고서, 내용 확인을 제대로 한 거 맞아요?"
"네. 팀장님께서 어제 회의에서 알려 주신 대로, 개발 1팀 김 수석님께 연락해서 자료 확인하고 정리해서 보고 드린 건데요."
"오늘 임원 회의에서는 개발팀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던데... 제대로 본 것 맞아? 숫자가 안 맞아서 완전 혼났잖아. 그리고 결론이 왜 부정적이야. 어떻게든 해보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제 팀장님께서 회의 시간에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고..."
"아, 됐고. 여하튼 오늘 회의에서 GO 하기로 했으니까 자료 확인하고 결론 수정해서 다시 정리해 와요."
진짜 분명 어제 회의에서 하라는 대로 정리해서 가져갔는데 왜 이제 와서 딴 소리야. 기분 좋은 오후였는데, 아 짜증 나네. 언제 수정해서 다시 보고 하지? 설마 또 뭐라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자기가 한 말입니다. 내 입으로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 말의 무게는 고스란히 자기가 지게 되니까요. 적어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어떻게 해 달라고 요청했던 말의 무게를 느낄 겁니다.
그러나 실제 회사에서는 어제까지는 이랬던 상황이 오늘은 완전 달라지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특히 서로 다른 부서 간에 입장이 다를 때는 상급 회의에서 윗선의 결정에 따라서 결론이 뒤집혀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팀장 입장에서는 다른 팀에 까이는 것도 속상한데 준비한 팀원들에게 체면도 서지 않아서 당황스러울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성숙한 매니저라면 상황을 공유하고 어떻게 해결해 갈지를 함께 고민해 갈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장에서 만나는 어른들은 속상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이렇게 괜한 화풀이로 풀기도 합니다. 그리고 했던 이야기를 번복하면서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떼는 사람도 있고 괜히 아랫사람 탓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상사를 만나면 회사 생활이 편할 수 없습니다. 미생에도 나오죠. 회사를 간다 라는 건 내 상사를 만나러 가는 거라고... 자기가 한 말의 무게도 감당 못하는 사람이 내 상사라면 열심히 일할 의욕이 안 생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입사하고 6년 즈음, 대리 시절이었는데 정말 이상한 팀장이었죠. 말 바꾸기 일수이고 괜한 트집 잡아서 보고서 반려하고 사적인 일 시키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퇴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추석이라 고향에 내려갔었는데 평소보다 말이 없이 있는 저를 보고 직장 생활을 오래 하신 숙부님께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으시곤 하신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직 대리인 너도 알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 거야. 지금은 너무 힘들겠지만 팀장도 영원한 건 아니니까, 말도 바꾸고 신뢰를 잃는 사람은 오래 그 자리에 있지 못할 거다. 그러니 너는 네가 할 일을 하면서 널 지키렴. 그러다 보면 새로운 사람으로 바뀔 거야. 그리고 만약 1년이 넘게 상황이 지속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그건 그 회사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거니까 그때 돼서 이직을 고민해도 될 거야."
정말 작은 아버님 말씀대로 8개월이 지나자 문제 있던 팀장은 다른 구설수로 자리를 옮겼고 사람이 바뀌자 사람 때문에 있었던 문제들도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가끔 지금 상황이 계속될 거 같고 관계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고 진짜 중요한 건 자기 자신입니다. 팀장은 팀장이고 나는 나니까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럼, 이렇게 말이 바뀌는 상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첫째는 확인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지시 사항을 전달받으면, 내용을 정리해서 확인받으세요. 그리고 결과를 보고할 때 지시한 내용을 미리 명시해서 지금의 보고가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재확인하면 좋습니다.
“팀장님. 어제 지시하신 시장 조사 보고서를 첨부와 같이 보고 드립니다. 요청하신 대로,
1. 2021년도 판매 현황을 기준으로 도표로 작성했습니다.
2. 구매기획팀 김 과장님과 매출 규모와 구매 본부 입장에 대해 확인했습니다.
3. 최종 결론은 새 프로젝트를 하반기까지 마무리하기 위해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정리했습니다.
수정할 사안 있으시면 확인 부탁드립니다. “
이렇게 주요 지시 사항을 적시해서 보고하면 설령 외부 회의에서 방향이 틀어져도 엉뚱한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설령 방향이 바뀌어도 어떤 부분은 유지하고 어떤 부분은 수정해야 하는지 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갑자기 지시가 바뀌었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결정에 필요한 정보가 늘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는 않으니까요. 물론 왜 바뀌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쨌든 지나간 지시는 과거이고 집중해야 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여기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새로운 지시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제 지시하셨던 A 대신에 B로 다시 정리하라는 말씀이신 거죠?" 대신 새로운 요청인만큼 일을 마무리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지원도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팀장 입장에서는 본인도 민망한 상황이라 지원을 거절할 명목이 없으니 쉽게 허락받을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시가 산만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해야겠죠. 그리고 지난 요청에서 반드시 살릴만한 부분이 있다면 일단 지시한 대로 새로운 요청에 맞춰 일을 하되, 대안이나 추가 제안의 형태로 간단히 정리해서 부록으로 붙여 두면 좋습니다. 결국에 일은 가야 할 방향으로 가기 나름이니까요. 어떤 방향으로 가든 스스로 했던 고민의 방향이 옳고 그 고민들의 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면 나는 그만큼 성장한 셈이고 사람들도 다 알아볼 겁니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지시 변경에 당황하지 말고 나부터 중심을 잡아 봅시다.
지시는 기록하고 확인한다. 보고 시에 지시 사항을 재확인한다.
지시 변경이 날 무시하는 건 아니다. 새로운 지시에 집중하자.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지시가 산만해도 해야 할 일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