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원 Aug 25. 2022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휴직 기간의 절반을 지나가면서 아내가 물어봤다.


당신 남은 기간 동안에 해보고 싶은 것 없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데 익숙한 나에게 어색한 질문에 한동안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여보, 나 그림 배워보고 싶어."


대학 시절부터 카메라로 사진 찍는 걸 즐기는 나는 늘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부러웠다.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가거나 아니면 그냥 걷다가도 낯선 풍경을 만나면 내 마음 가는 대로 그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져간 노트에 몇 번 끄적끄적해 보기는 했는데 늘 어색한 결과물만 나왔다.

광교 호수마을에 있는 벨피움 화실

아내가 다니는 요가 학원 근처에 "어반 드로잉"을 가르쳐 주는 작은 화실이 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등록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 오후에 2시간 반 동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일 낮이라 수강생 중 남자는 나 밖에 없었다. 수채화를 기반으로 하는 수업이지만 일단 밑그림은 펜으로 그려 봐야 했다. STAEDTLER pigment ligner하나 들고 선생님이 주신 해칭 연습을 반복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해칭 연습 예제. 모두 A4 한장 남짓 해서 반복해서 연습했다.


그다음에는 컨투어 드로잉이라고 펜을 떼지 않고 사물을 보면서 표현해 보는 연습을 했다. 그동안 스케치를 하면 연필로 하고 보이는 대로 그대로 표현해 보려고 애썼는데 그러면 계속 고치고 수정하다 지저분해지곤 했다. 선생님 말씀은. "어차피 사진처럼 똑같이 그릴 수는 없어요. 휘어져도 어긋나도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니까 마음이 가는 대로 끝까지 한번 그려 나가 보세요. 그러다 보면 사진이 아닌 그림 모습이 보일 거예요."


선생님 말씀대로, 펜으로 이어서 그리니 좀 찌그러져도 그 나름대로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이런저런 사물들을 그려 보면서 연습을 하고 있다.  

되도록 펜을 떼지 않고 보이는대로 내키는대로 표현하는 재미가 있다.


전체적인 구도를 잡는 방법도 배웠다. 캔버스에 위치를 잡고 어떻게 화면을 배분할 것인지를 어림 잡았다. 연필 스케치를 해도 되지만 없이 해 보았다. 처음에는 엄두도 나지 않았던 복잡한 건물들도 선생님께서 직접 하시는 걸 옆에서 보면서 따라 하다 보니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큰 틀을 정하고 각 층이나 장식의 비율이 유지되도록 유의하면서 디테일한 음영에 조금만 신경 써 주면 투박해도 그럴듯한 펜그림이 완성되었다.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 정면. 다 그리는데 두시간이나 걸렸지만 뿌듯했다.


배운 경험으로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들을 하나씩 담아 보기 시작했다. 좀 어색해도 그냥 그렸다. 하면 할수록 부담은 줄고 즐거움은 늘었다.  



그리고 채색도 시작했다. 펜으로 그린 그림 위에 수채 물감으로 하나씩 채워갔다. 똑같은 그림자 회색도 세비아를 섞으면 따뜻한 느낌이 들고, 인디고 블루를 섞으면 차가운 느낌이 났다. 같은 색을 많이 만들고 물을 섞어 가면서 농담을 표현하는 과정은 4주가 지났지만 여전히 어렵다.


처음 채색한 그림. 수채화의 느낌이 그림자에서 느껴진다.


그래도 그림을 그리는 2시간 반 남짓한 시간이 너무 즐겁다. 아무런 생각 없이 선을 긋고 색을 섞고 붓을 놀리다 보면 금세 시간이 지나가고, 캔버스에는 그동안 상상도 못 해본 그림들이 그려진다.


한점 투시로 골목길을 표현한 그림. 어제 완성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온전히 나만의 눈으로 보고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행복해졌다. 남은 기간 동안 차근차근 배워 봐야지. 시작하길 잘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믿는다는 말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