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보다 더 오래 같이 보내지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어 1
완연한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나는 살찌는 계절. 주말에 친구들 만나서 술 한잔 하는데 날씨가 쌀쌀해지니까 왜 이렇게 국물 요리가 당기는지.... 나트륨 가득한 전골 요리를 양껏 먹고 왔더니 늘 입던 바지가 부담스럽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주문한 샐러드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했다. 생각해 보니 도시락 먹으면 자리에서 빠르게 해결되니까 남는 점심시간에 이것저것 할 수도 있고, 밥 먹는 중에 잔소리도 안 들어도 되니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 진작에 그럴 걸 그랬어.
점심 식사 시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리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구내식당으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쪽 출입구로 향하는 팀원들 뒤에서 일어나 이야기했다.
"저는 오늘부터 도시락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웬 도시락? 다이어트해?"
"네. 제가 식단 조절을 해야 해서"
"에이,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 한 식구지?, 황 책임, 안 그래?"
"그러게요. 나 연구원, 그러지 말고 같이 먹으러 갑시다."
"저....." "알았어. 그럼 우리끼리 먹고 올게.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같이 식사합시다. 괜찮지?"
"네...."
어휴. 밥 한번 따로 먹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우리가 직장 동료지 가족이야? 왜 업무시간이 아닌 식사 시간에 내가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냐고. 앞으로도 계속 눈치 줄 것 같은데 어쩌지?
최근에 "이가인 지명"이라는 중국 드라마를 봤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또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외롭게 지내야 하던 아이들을 주인공인 젠젠의 아빠가 챙겨 주면서 자라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식당을 운영하던 아빠는 늘 아이들의 밥을 챙겨 주면서 이야기합니다.
"핏줄 같은 거 하나도 안 중요하다고, 같이 밥 먹고 서로 아끼면 그게 가족이야."
휴직을 하고 아이들 밥을 매 끼 챙기면서 더 느끼게 됩니다. 밥을 하고 같이 먹는 건 참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요. 회사에서도 하루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료들과 함께 밥 먹는 시간만큼은 되도록 함께 하려고 합니다. 밥 먹으면서 개인적으로 어려운 이야기도 하고, 끝나고 산책도 하고 나면 그래도 함께 하는 "食口"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교감도 편한 사람과 함께 해야 즐거운 법입니다. 함께 있으면 불편한 사람과의 식사 시간은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식사 자리에서도 업무 이야기를 꺼내고, 메뉴도 마음대로 정하고, 자리에 없는 사람 험담을 일삼으면서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는 되도록 피하고 싶습니다. 식사 시간은 엄연히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개인 시간이니까요.
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의 의미를 주로 휴식과 재충전이라고 답했어요. 그리고 보통 휴식은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때니까 혼자 따로 밥 먹는 것이 제일 목적에 맞는 방식일 듯합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식사에 대한 회사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서 안전을 위해서도 혼자 밥 먹는 것이 오히려 권장되기도 하고, 식당에서도 거리를 두고 대화도 삼가게 되었죠. 나만의 시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보내는 것을 서로 인정해 주는 문화가 자리 잡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다만, 저는 일로 만난 사람 사이에도 서로 일이 아닌 다른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계기는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합니다. 식사하러 가는 길에 오며 가며 하는 캐주얼한 이야기들이 아이스 브레이킹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팀장으로서 팀원들에게 있습니다. 같이 가자고 일어났는데, 그 자리에서 저는 따로 먹겠습니다라고 단호히 이야기하면 호의를 거절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 혼자 밥 먹겠다는 의사 표시는 밥 먹으러 가는 길보다 그전에 알려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긴 회의를 마쳤거나, 한 프로젝트가 잘 끝나는 것 같은 이벤트가 있으면 그럴 땐 뒤풀이 삼아 같이 식사를 하는 유연함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망설여지네요. 팀장들도 식사 시간은 개인 시간이고, 각자 최선의 방법으로 재충전하는 것이 필요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또 밥 같이 먹는 자리만 한 팀원들끼리 케미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러니 같이 밥 먹자는 이야기를 너무 큰 간섭이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관건은 불편하지 않아야 하는 거겠죠? 저부터라도 저랑 같이 밥 먹는 사람들이 불편하게 하지 않는지, 일 얘기는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권하는 메뉴도 존중하고, 개인적인 질문은 삼가고, 되도록 많이 듣고 힘 나는 리액션해 주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관계는 늘 서로 노력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혼자 밥 먹겠다는 의사 표시는 미리 하자.
같이 밥 먹자 이야기에 너무 큰 간섭이라 오해하지 말자.
내가 혹시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인지 점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