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보다 더 오래 같이 보내지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어요 2
"자, 오늘 회식인 거 다 알지? 날씨도 쌀쌀하고 요즘 미세 먼지도 심하니까 오래간만에 삼겹살 먹으면서 목에 낀 먼지도 씻어내고 술도 한잔 하자고. 빠지는 사람 없기야."
아침 팀 회의를 마치면서 이 팀장이 신이 나서 이야기한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회식이네.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회식이 금지돼서 편했었는데, 위드 코로나 되면서 다시 시작됐다.
유부남 선배들은 회식 날이 즐거운가 보다. 아마도 집에 공식적으로 술 마실 수 있는 날이라 그런 것 같다. 술을 먹어야 하니 메뉴도 늘 비슷비슷하다. 주로 삼겹살 구워 먹고 어쩌다가 중식이나 일식. 좀 다른 메뉴로 해 보자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싫은 건 술 먹이는 분위기다.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는 회식에서 풀어야 한다며 소주잔이 돌아간다. 아 나도 김 책임님처럼 종교 이유라고 그러고 안 마신다고 딱 잡아뗐어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나마 좀 불편한 자리 늦게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슬쩍 김 수석님께 이야기를 꺼내 본다.
"수석님, 제가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조금 더 작성하고 가야 해서요. 오늘 회식에는 조금 늦게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민지 씨, 그러지 말고 일찍 같이 갑시다. 오래간만에 팀 회식인데 민지 씨 없으면 섭섭하잖아."
"아니에요. 그래도 마무리를 좀 하고 가야 할 거 같아서요. 먼저 드시고 계세요."
"어허, 같이 가자니까. 무슨 보고서인데 그래? 내가 팀장님께 말씀드릴게. 회식도 업무의 연장인 거 몰라?"
업무의 연장이라면 잔업비를 주셔야죠. 왜 부담을 주고 그러세요. 사무실에 받은 스트레스는 그때 그때 푸시지 왜 회식에서만 풀려고 그러냐고...
제가 입사했던 2000년대 초반, 회식을 가면 선배들이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IMF 오기 전에는 정말 회식하면 진하게 놀았어. 그때는 물가도 쌌지만 회사에서 1/2차 다 대주고 그랬거든. 그래서 밤새 마시고 회사에 들어와서 자고 그랬다니까." 이런 무용담을 꺼내면서 2차는 내가 살 테니 가자는 선배님을 따라서 늦게까지 술자리에 있다가 그 선배네 집에서 자고 출근했던 기억이 신입사원 시절에 있습니다.
그때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사원들 간의 유대감과 친밀감을 올리는데 회식만 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죠. 그러니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서 그런 행사를 만들고 그렇게 낮과 밤을 함께 보낸 직원들은 가족처럼 평생직장을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코로나도 겪은 지금의 회식 모습은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습니다. 1가지 술로 1차만 9시 전에 끝내자는 고용 노동부의 119 캠페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회식은 이제는 지나치면 해로운 이벤트로 인식됩니다.
가끔 회식 중 사고에 대한 책임 공방에 대한 소식이 뉴스로 보도되곤 합니다. 보통은 회사의 책임이 명확하다는 판결이 나는 걸 보면, 농담처럼 했던 회식이 업무의 연장이라는 말은 일견 사실인 듯합니다. 회사가 주관하고 책임지는 공식적인 이벤트인 거죠.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는 큰데 사원들 단합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회식에 예산을 많이 둘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팀의 성과를 책임지는 팀장 입장에서는 팀원들 사이가 긴밀해 지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Chemistry"라고 하는 요소는 확실히 팀 성과에 영향을 주니까요. 하지만 회사에서 지원도 줄고, 회식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팀원들도 많고, 괜히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 나니, 팀장 입장에서도 좋은 회식을 만드는 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회식이 줄었다지만 밤거리 술집에는 여전히 다양한 만남들이 있는 걸 보면, 회식 문화가 바뀌는 건 사람들이 각박해져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직장인들의 인간관계가 회사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편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일로 만난 사이, 그 이상이 될 필요는 없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누구든 가까워지려면 함께 한 즐거운 기억들이 많아야 하겠죠. 술을 강권하는 회식 자리는 누구에게나 즐거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술을 너무 권하지도 말고 권하는 사람에게도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부하세요. 회식의 목적인 친밀도이지 술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술 대신에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즐거우니까 회식도 되도록 즐거운 활동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건 자기가 제일 잘 알 테니 그걸 함께 해 보자고 제안하면 어떨까요?
제가 처음 조직을 맡았을 때 신입사원이 제안해서 다 같이 만화방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각자 취향껏 보고 싶었던 만화 실컷 보고 보드 게임도 함께 하면서 즐겁게 보냈습니다. 그 뒤로는 회식을 담당하는 순번을 정해서 각자 자기가 하고 싶거나 먹고 싶은 걸 돌아가면서 제안하고 다 같이 해 봤습니다. 볼링도 치고, 당구도 하고, 와인도 마시고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활동들을 하면서 더 끈끈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색다른 회식 문화를 못 받아들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 팀장님들도 어디로 회식 갈까 가 늘 고민입니다. 그 짐을 덜고 새로운 첫 발을 내딛고 나면 의외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취향을 경험해 보는 걸 즐거워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면서 예전보다 더 가깝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때 제게 제안해 주었던 후배님처럼 여러분도 용기를 가지고 여러분이 하고 싶은 활동을 같이 해 보자고 제안해 보세요. 요즘은 기업에서도 생산적인 회식이 되기 위한 고민들이 많습니다. 분명히 제안받는 선배들도 반가워할 것이고 또 나름 즐거워할 겁니다. 적어도 나는 어떤 걸 원하고 즐거워하는지는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이 하자는 것도 이번 기회에 한번 해 봅시다. 그렇게 소통해서 서로를 알아 가는 것이 회식을 하는 진짜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은 개인의 취향이다. 강권하면 정중히 거절하고 남에게 강권하지도 말자.
피할 수 없으면 즐긴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 즐길 거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해 보자.
서로 알아가는 좋은 기회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도 즐겁게 한번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