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보다 더 오래 같이 보내지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어 - 5
연말이다. 각 부서 별로 내년 목표를 제시하라고 압박이다. 너무 과하게 내놓으면 내년에 달성하기 어려울 테고, 그렇다고 너무 작게 내놓아서 다른 팀에 비해 초라해 보이기는 싫은 어려운 눈치 게임이 진행 중이다.
출근했더니, 메신저 창에 본사에 있는 동기한테서 연구소 왔는데 커피 한잔 하자고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사내 카페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 왔다. 우리는 우리대로 힘들지만, 본사는 본사대로 힘든 것 같았다. 서로 잘 버텨 보자고 하고 헤어지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후에 임원 회의에서 갔다 온 상무님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돌아왔다. 팀장님들 불려 가서 엄청 혼이 나고는 팀원들이 다 회의실에 모였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상무님 임원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아, 몰라. 우리 OP 내년 원가 저감 목표치가 올해보다 30% 이상 다 상향 조절됐다고 그러네."
"네? 올해 목표도 거의 억지로 맞췄는데 이게 왠 날벼락인 거예요."
"임원 회의에서 본사 재무 담당 부사장이 그랬대. 연구소에서 원가 저감 아이템으로 큰 건이 있는데 목표에 미리 반영될까 봐 오픈 안 하고 있는 거 다 안다고. 대략적인 수치까지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덕분에 상무님은 몸만 사리는 쫄보로 사장님한테 혼나고... 아, 누가 재무팀에 알려 준거야. 아직 제대로 진행될지 100% 확신도 없는 아이템인데... 여하튼 분위기 안 좋으니까 다들 입조심하라고."
"네..."
헉! 아침에 동기한테 가볍게 한 이야기가 벌써 거기까지 간 거야? 사람들한테 미안한 것도 그렇지만, 이야기한 사람이 난 줄 알게 되면 어쩌지. 아, 회사 다니면 어쩔 수 없다더니 정말 사내 정치에는 얽히고 싶지 않단 말이다.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모인 공간에는 각자 입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매일 같이 밥을 먹고 피를 나눈 가족들도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르기 마련이죠. 이익에 얽혀 있지 않은 모임마저 그런데, 하물며 이익을 위해 모인 계약으로 얽힌 회사는 더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큰 회사의 각 기획, 재무, 인사, R&D, 생산 같은 각 본부들은 역할 자체가 다르고 또 서로를 견제해서 회사 전체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일을 하도록 배분되어 있기 때문에 입장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충돌 자체가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 다름이 시너지가 나도록 잘 조율하는 것이 경영의 가장 큰 역할일 겁니다.
그러나 곡식창고인 사일로처럼 각자 자기 부서만의 이익만을 주장하게 되면 협업은 어려운 일이겠죠. 더군다나 고과, 승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상사가 내 말을 들어야 한다며 라인을 서기를 강요하는 상황이면 직장 생활이 즐거울 리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직장인들이 '사내정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사실 목표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정치는 피할 수 없습니다. 승진을 앞두고 고과권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애쓰는 것이나,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좋은 관계를 만들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은 행동 모두가 일종의 정치 행위입니다.
그러니 '국회의원'들을 떠올리며 사내 정치라는 말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각자의 위치에 맞는 나만의 정치를 하면 됩니다. 원칙을 정하고,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고,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과 권한을 넘어서는 일들을 나누어서, 투명하게 움직이는 거죠.
부서 내 윗사람들에게서 상반된 지시가 오거나, 외부에서 부담스러운 요청이 오면, 직속 상사에게 보고하고 조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외부의 요청이 부서의 이익에 반하지만 회사 전체에는 이익이 되는 일이라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되면 그런 의견은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됩니다. 다만, 최종적인 결정은 결정권자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지켜보고 있다면서 앞으로 챙겨 주겠다는 상사가 있다면 감사히 관심을 받으셔도 됩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받고, 그 기대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건 자기 발전에도 좋으니까요. 그러나 챙겨 주는 대신 사적인 모임으로 확대하거나 업무상으로 지나친 요구를 해 오면 명확한 선을 긋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번 들어주면 내 사람이다 생각하고 더한 요구가 이어질 겁니다. 그러니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옳은 일인가? 이 사람과의 관계로 내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바라는 보상이 지금의 부담스러움과 불편함보다 더 중요한가?
어디까지 받아들이는 건 각자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조직 내에서 영원한 자리는 없습니다. 달도 차면 기울고, 영원할 것 같았던 윗사람도 어느 순간 자의로 또 타의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런 이동의 순간에 과연 본인 스스로의 안위보다 내 라인에 있던 사람의 미래를 더 신경 쓰는 상사가 있을까요?
그러니, 불편한 요구를 들어주고 난처하고 스트레스받고 전전긍긍하지 말고 스스로의 원칙에 맞게 선을 긋고 당당하게 일하십시오. 그런 편한 마음으로 하는 일이 더 잘 되고, 본인도 더 성장할 것이고, 제대로 된 조직이라면 그렇게 투명하고 큰 사람에게 맞는 일을 찾아 줄 겁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 정치적인 사람입니다.
상반된 요청이 오면 상사에게 보고하고 조정을 요청하자.
불편한 요구를 받으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정하자.
스스로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은 거절하는 용기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