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시의 "AFTER SHOCK"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 를 읽고.
경제 전망이 어둡다. 제로 금리로 돈이 넘쳐 나던 시절의 호황기는 인플레이션 위기로 제동이 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금리 인상이 시장 자체를 얼어붙게 하고 있다. 높아진 금리에 가계 대출의 부담은 증가하고, 대출 길이 막힌 부동산 시장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모두들 경기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전보다 더 1인당 GDP도 높아졌고, 생활은 더 윤택해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살기 더 팍팍해졌다. 자살률은 OECD 중 1등이고, 출산율은 압도적인 꼴찌다. 현실도 미래도 어둡다는 반증인 셈이다. 그야말로 위기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경제학과 대학생에게 추천하는 영상을 통해 우연히 읽게 된 로버트 라이시의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는 역사적으로 미국이 겪었던 가장 큰 위기였던 1920년대 경제 대공황과 2008년 리만 브라더스 사태를 돌아보면서 경제적인 위기가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고찰을 전해 준다. (이미 책은 절판되었고, 중고 서적은 5만 원이 넘는 웃돈으로 거래되고 있어 도서관에서 빌릴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흥청망청 소비해서 위기가 왔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소비는 죄가 없다. 내가 어제 들린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고, 내가 준 만원으로 약사님은 바로 앞 칼국수 집에서 식사를 하실 것이고 그 돈으로 칼국수 사장님은 태안에 있는 해물 가게에서 바지락을 구해 올 수 있을 거다. 같은 만원인데 그 돈이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돌고 돌면서 각 경제 주체들이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해 준다. 소비가 돌아야 생산도 느는 법이다.
그럼 사람들은 언제 소비를 할까? 간단하다. 원하는 것이 생기고,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 우리는 소비를 한다. 곧 카드값으로 사라질 월급이라도 들어온 그날은 왠지 든든한 마음에 집에 들어가는 길에 치킨 하나 사 갈 수 있는 게 우리 삶이다. 소비가 줄었다는 얘기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없어졌거나,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뜻일 것이다.
둘 중에 원하는 것이 줄어들지는 않은 것 같다. SNS에 돌아다니는 무수한 행복한 삶의 모습들은 시샘과 부러움을 먹고 자란다. GDP가 높아지고, 생활 수준은 분명히 올랐으니, 이왕이면 큰 집, 이왕이면 더 큰 차를 원한다. 실제로 미국도 집의 평수가 1980년대 보다 2010년대가 1.5배 더 늘었다. 전체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의 수준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결국 주머니 사정이다. 전체 경제 규모는 늘었지만, 늘어난 부가 제대로 분배되지 못하면서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궁핍해졌다. 대량 생산된 공산품들이 대량 소비되려면 부의 분배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을 잠식한 소수가 대량 소비자들의 손에서 구매력을 앗아감으로써 자신들의 생산품에 대한 수요마저 없애버렸다. 결과적으로 마치 포커 게임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칩이 집중되듯이 다른 국민들은 돈을 빌려야만 게임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고, 그렇게 빌릴 수 있는 돈이 한계에 다다르면 판은 무너지게 된다.
1929년 대공황 시절에 미국 상위 1% 부자들이 차지하는 수입은 전체 생산량의 23%에 달했다. 그렇게 균형이 무너진 경제를 되살린 것은 "근로자가 곧 소비자다."라는 믿음으로 중위 계층의 소득을 높이는데 집중한 뉴딜 정책이었다. 금리를 낮추고 공공사업을 늘려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냄으로서 사람들은 다시 물건을 살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
정부는 최상위권의 소득세율을 (무려!) 70%로 두고 상위 1% 부자들이 차지하는 수입이 10% 내외가 통제되도록 했다. 법인세율 26%이 높다고 늘 망한다는 전경련의 엄살이 무색하게도 그 시절 미국은 오히려 1950년부터 1980년 동안 풍요의 시대를 누리게 된다. 이 당시 경제는 꾸준히 성장했고, 그 성장의 열매는 잘 분배되어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이 가능한 시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석유 파동으로 온 불경기를 등에 업고 당선된 레이건이 소득세율을 낮추면서 생산과 소비 사이의 합의는 깨어지게 된다. 공장 자동화와 세계화로 노동자의 수요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주식과 부동산의 바람을 타고 투자라는 명목의 금융 자산의 비중을 갈수록 커져 갔다.
사람들은 실업하고 재취업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에도 만족해야만 했다. 원하는 것과 주머니 사정 사이의 갭은 가격만 높아진 부동산을 통한 대출로 채워졌을 뿐이다. 그렇게 다시 소수에게 부의 집중이 과속화되어 다시 1%의 상위 그룹이 23% 이상의 수입을 독차지하게 된 2008년에 다시 리만 브라더스 사태와 같은 대불황이 찾아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번엔 해법도 더 가당치 않았다. 정치를 꾸려 나가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드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많은 걸 더 생산하기보다 많은 돈을 버는데 더 집중하는 월스트리트의 금융 전문가들에게 우리 삶이 좌지우지되는 경제를 맡겨 버렸다. 그들은 본인들의 도박과 잘못된 구조로 일어난 불황을 협박 삼아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 금융을 은행권에 뿌리고 그렇게 회생한 은행들은 저평가된 주식들을 쓸어 모아 다시 성과급 파티를 벌렸다.
그렇게 금융이 살고 부동산이 오르고 주식이 오르면 경기는 회복된 것 같지만, 실물 경제가 좋아지려면 임금이 올라서 소득이 늘고 그래서 소비가 늘어야 한다. 두 번의 경제 불황을 겪고도 우리는 깨닫지 못했다. 1990년대 이후 주식과 부동산이 경제 상황을 대변하는 지표처럼 되어 버렸지만, 이 둘은 내가 방금 사 먹고 지불한 치킨값 같이 구성원들 간의 생산을 증폭시키는 효과는 거의 없다. 그저 장부 상에 남아 삶과는 괴리된 부의 숫자로 존재할 뿐이다.
그동안 우리 경제는 성장했고 사람들은 나의 삶도 더 좋아질 거라고 기대했지만 사실 부는 소수 몇 사람에게 집중되고 실질 임금은 떨어졌다. 실물 경제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돌고 돌아야 하는 돈들은 투자와 부동산에 묶여서 더 빈부격차를 크게 만든다. 한 사람이 벌어서 살기 힘드니 맞벌이가 늘고 안 그래도 적은 일자리에 구직자는 많으니 청년들이 취직이 힘들 수밖에 없다. 취직해도 내 집 마련이 어려운 이유도, 아이를 잘 낳아 출산율이 급락하고 삶이 더 팍팍하다고 느끼는 모든 이유가 제대로 된 임금을 주는 직업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이 불평등의 구조에 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0년 전 저자는 1) 일정 금액 이하의 소득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조금을 주는 역소득세를 도입하고 2) 탄소세를 부과해 저소득층에 영향이 큰 기후변화에 대응하게 유도하기를 제안했다. 3) 부자들의 한계 세율을 적어도 50%까지 인상하고 금융 소득도 근로 소득과 동일한 세율을 적용하라고 추천했다.
4) 실업자에 생활비를 대주지 말고 재 취업하면 1년간은 기존 임금의 90%까지 보전해 주는 재고용 대책으로 삶의 질 하락을 막고, 5) 소득에 따른 학교 바우처. 6) 학자금 대출을 의료보험처럼 펀딩 화해서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덜 내는 차등제를 7) 전 국민 메디케어와 8) 도서관 공공의료와 같은 공공재 활용을 주도하는 9) 깨끗한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난 십 년 동안, 세상은 저자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다시 대출의 임계점에 다다른 지금, 100년 전에는 묘책이었던 제로금리도, 돈 찍어내서 받쳐주는 정부도 인플레이션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이 자본주의의 세 번째 위기가 아닐는지.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는 늘 극단적인 순간에 노선의 수정을 통해 생존해 왔었지만, 그 과정이 늘 순탄치 만은 않았다. 부디 이번 변화에 선량한 이웃들이 덜 고통스럽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