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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방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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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Jul 19. 2024

제시간에 운행되지 못해도 대단히 감사합니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055로 시작하는 걸 보니 경남 소재 어느 대리점의 휴대폰 혹은 보험 광고이겠거니 하면서도 일단 받아본다. 혹시 마트에서 경품에 당첨됐다고 걸려온 전화일 수도 있으니까? 풉.

아쉽게도 경품 당첨 전화는 아니다. 광고도 아니다. 다급한 여자 목소리다.

"여기, 밀양역인데요..."

잘못 걸려온 전화가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지금 내가 기다리는 열차가 밀양행이었다. 진주로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 밀양에서 환승할 예정이었다.

여자는 자기가 밀양역 직원이며 오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기차들이 줄줄이 지연되고 있다고, 3시 언저리에 부산에서 밀양으로 가는 ITX 열차는 90분이 지연될 예정이라고 했다.

"90분이요?"

되묻는 내 말에 상대방이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려던 것뿐인데. 울먹이다시피 하는 말을 한참 더 듣고서야 나는 그녀가 전화를 걸어온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환승을 못할 수도 있단 말씀이시죠?"

"네..."

잔뜩 주눅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제가 방법을 찾아봤는데요..."

예약한 열차보다 20분 일찍 출발하는 열차가 있고 그걸 타면 이어지는 열차에도 무사히 환승할 수 있다는 거였다.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와의 통화 중 가장 밝은 목소리였다.


안내받은 대로 기차표를 새로 예매하고 지연된 기차표의 환불 버튼을 눌렀다. 취소수수료가 700원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어쩐지 아깝다는 생각에 잠시 페이지를 벗어났다가 시간을 끌어봐야 별 수 없겠다 싶어 다시 환불 버튼을 눌렀다. 그사이 취소수수료가 0원이 되어 있었다.

잠깐 사이 사라진 수수료와 밀양역 직원의 울먹이는 목소리. 오늘 장맛비 때문에 일어난 일련의 비상사태로 분주해진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차표를 바꿨더니 밀양역에서 30분 이상 여유가 생겼다. 플랫폼이 어수선하길래 역사로 이동하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좀 이상하다. 콘크리트벽 대신 임시 가벽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에 표지판 대신 종이에 인쇄한 화살표가 드문드문 붙어있다. 화살표를 따라 도착한 공간도 가만 보니 임시 역사였다. 일대가 공사 중이었다.

좁고 붐비고 날씨 탓에 쾨쾨한 냄새마저 나는 임시 역사에서 나와 다시 플랫폼으로 돌아왔다. 벤치마다 서너 사람씩 빼곡히 앉은 시골 역사치고는 드문 풍경을 지나 빈자리가 남은 벤치를 발견했다.

옆자리는 50대쯤으로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30초에 한 번꼴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씩씩대며 숨을 쉬고, 혼잣말로 쉴 새 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스피커에서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 열차가 제시간에 운행되지 못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서 코뿔소와 같은 기세로 걸어갔다. 아저씨의 발걸음이 향한 저편에는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있었다.


미뤄진 열차시간 때문에 중요한 회의에 늦은 사람도 있을 테고 예약해 둔 병원진료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테다. 이어지는 교통편을 이용할 수 없게 된 사람도 있고 어렵게 잡은 면접기회를 놓친 사람도 있겠지. 마지막 경우는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안내방송에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해 듣다 보니 밀양역 언니가 떠올랐다. (누가 그랬다. 고마운 사람은 다 '언니'라고.) 지나치게 공손했던 말투와 마지막 인사에서 묻어난 안도가 머리에 맴돌았다. 플랫폼과 임시 역사를 가득 메운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고 불평불만을 들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주눅 든 목소리가 이해되었다.

고객들이 당면한 아찔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한 손에는 전화를, 한 손에는 마우스를 들고 대체 차편을 알아보고 있었을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다시 가벽에 붙은 화살표를 따라 임시 역사로 가고 싶어졌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초코바라도 하나 사서 그 언니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 말대로 내가 환승할 기차는 무사히 도착했고 초코바는 생각에만 그쳤다.


어릴 때는 어른들 세상이 완벽하게만 보였다.

어른이 되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친구들이 자기네 회사는 시스템이 아주 엉터리라며 열을 낼 때는 내심 안도하기도 한다. 다들 비슷하구나, 싶어서.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세상을 움직이는 회사의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도 예상치 못하는 상황에서는 삐끗할 수 있다. (아니, 비가 이만큼 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일기예보에서 알려줬는데 왜 미리 준비를 못했냐고? 그 예보는 당신들도 봤잖아요. 미리 예상해서 기차, 버스, 비행기 다 예매해 두지 그러셨어요...)

완벽한 어른이 될 줄 알았던 내가 여전히 많은 면에서 서툴고 빈틈 투성이인 것처럼, 우리가 움직이는 세상도 늘 완벽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어릴 때 세상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건, 세상이 정말로 완벽하게 돌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빈틈을 보일 때마다 그 빈틈을 메워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늘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기차가 지연된다고 말해준 밀양역 언니처럼.

세상이 어쩌고 시스템이 어쩌고 하니까 내가 열차 하나쯤 놓쳐도 상관없이 태평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만약 그 언니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제시간에 데려오지 못할뻔했다.

오늘 밤에는 코레일 게시판에 들어가서 글 하나 써야겠다. 마음고생 꽤나 했을 언니한테 초코바는 주지 못했지만 칭찬글이라도 하나 써서 마음 중화시켜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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