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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Jun 27. 2021

모두의 가슴

모유수유의 시작이 힘들었던 진짜 이유

어제 엄마와 메시지를 주고받다 발끈하고 말았다. 엄마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출산 후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보니 엄마는 끼니때마다 내 식사여부를 챙기신다. 어제 점심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혼자서 아이를 돌보며 하는 식사란 기껏해야 떡이나 빵에 우유를 곁들이는 게 전부다. 어제도 냉동된 빵과 우유, 바나나 하나로 점심을 해결했었다. 있는 그대로만 말하면 이어질 엄마의 걱정을 듣기 싫어 "아침에는 미역국에 계란찜과 새우반찬을 곁들어먹었다"는 말을 보탰다.        

"잘 먹었네. 뭐든 잘 먹어야 지안이 밥도 넉넉하지."

엄마의 말에 나는 결국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애 밥 주려고 있는 사람이야? 밥 얘기 좀 그만해. 그냥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거야."                    


출산 후 엄마에게 발끈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돌이켜보니 이전에도 원인은 아이를 먹이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모유수유로 인한 불편을 토로하는 내게 엄마가 "그래도 6개월은 먹여야 지안이에게 좋다"며 면역성분이 있어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는 둥 모유의 장점을 나열했던 것이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던 나는 계속되는 엄마의 모유찬양에 결국 목구멍에 걸려있던 말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참 이상해. 내가 불편하다는데 자꾸 좋다고 말하는 건 결국 나보고 참으란 말인 거지."

주어를 확대하여 나름 우회적으로 표현했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한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었는데, 어제 또 비슷한 말을 하시는걸 보면 엄마는 내 말의 타깃이 정말로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고 생각하셨나보다.


출산 전 병원으로 가기 위한 짐을 꾸릴 때까지만 해도 모유수유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출산이라는 이벤트에 집중하다보니 이후의 일들은 출산 후로 막연히 미뤄두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내 몸에서 모유가 만들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에서 아기도 만들어졌는데 왜 모유가 만들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출산 후 나도 모르는 사이 병원에서 제공하는 모유수유 교육을 받고 있었고, 충분한 모유생산을 위한 미역국을 하루에 네 사발씩 들이켜고 있었으며,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내 몸의 회복과 같은 무게로 모유가 잘 나오는지를 걱정해주는 것이었다. 부모님들이 바쁘신 중에도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챙겨주셔서 내심 감동하다보면 마지막은 언제나 “그래야 모유도 잘 나온다”는 말로 끝이 났다. 이쯤 되니 모유수유는 내가 당연히 달성해야만 하는 중대한 과제처럼 여겨졌다.


조리원 입소 후 이틀째 되던 날 새벽,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깼더니 침대시트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무방비로 모유를 맞이했다. 부랴부랴 수유패드를 주문하고 다음날 조리원에서 서비스로 제공하는 가슴마사지를 받았다. 마사지 선생님은 내 가슴이 치밀유방에다 편평유두라 아이가 바로 물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며 나 같은 산모들을 위해 만들어진 보조도구를 추천해주셨다. 이름하여 ‘쭈쭈젖꼭지’. 그날 오후 바로 '쭈쭈젖꼭지'를 구입했다. 아이가 바로 젖을 물지 못할 상황에 대비해 조리원 방마다 유축기도 준비되어 있었다. 고민할 여지없이 나는 모유수유의 길로 들어섰다.


매일 새벽 3시 무렵이면 조리원 탕비실에서 유축부품과 젖병을 씻으러 온 눈이 퀭한 산모들과 마주쳤다. 음식물쓰레기통에는 젖몸살에 좋다는 양배추 잎이 한 무더기씩 쌓여있었다. 젖몸살의 고통이 출산에 버금간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난 나는 밤마다 알람을 열개씩 맞춰가며 유축시간을 지켰다.

모유수유를 결심한 이상 조리원은 조리를 위한 곳이 아니었다. 3시간 간격으로 일어나다보니 깊은 잠에 들지 못해 내내 피곤이 가시질 않았다. 직접 물리든 유축을 하든 구부정한 자세로 30여분씩 있다 보면 어깨와 목도 내내 뻐근하다. 유튜브에서 찾은 가슴마사지법을 따라 손가락으로 누르고 주무르다보면 손마디마디가 으스러질 듯 아파오는 고통은 덤이다.


몸의 통증보다 곤욕스러운 건 심리적인 부담감이었다. 모유수유가 엄마의 의무인양 당연시하는 조리원 내의 분위기와 부모님들의 모유수유에 대한 관심이 자꾸 나를 몰아세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모유수유는 수유의 한 가지 방법일 뿐이고 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 부부의 몫인데 이를 모성애와 결부시켜 '아이를 생각하는 엄마라면 당연히 모유수유'라는 공식을 들이대니 모유수유를 하거나 죄책감을 가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양쪽 30분씩 짜내도 유축량이 40ml를 넘지 않았다. 조리원 동기 누구는 처음부터 100ml가 나왔다더라, 누구는 양이 많아서 냉동실이 이미 절반쯤 찼다더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기들 여럿이 모이면 모유가 많은 사람은 은근히 모유생산능력을 과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덕분에 그렇지 못한 나는 내심 위축된 기분을 느껴야했다. 갈수록 아이가 먹는 양은 늘 텐데 모유량이 부족하면 어쩌지, 치밀유방에 편평유두라는 진단을 받은 내 가슴을 아이가 잘 못 물면 어쩌지 싶었다. 그러다 유축량이 점차 늘어서 80ml가 되고 100ml가 되자 성취감마저 느껴졌다. 그게 뭐라고.


결과적으로 모유수유에 성공하여 출산 후 80일째인 아이는 오늘도 내 모유를 먹고 자라고 있다. 그사이 유두가 찢어지는 고통을 한차례 겪기는 했지만, 대견하게도 아이는 출생 20일 무렵부터 보조도구 없이도 잘 빨기 시작했고, 우려했던 젖몸살도 다행히 없었다. 지금은 젖병을 씻는 수고 없이 아이가 원할 때마다 먹일 수 있다는 장점에 만족하고 있다. 아이의 호흡이 내 살결에 와 닿을 때,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볼 때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내 몸에서 나온 모유가 아이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손톱, 발톱, 머리카락이 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감격스럽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 건 내가 수유의 방법을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등 떠밀려 어영부영 모유수유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유수유는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 불편을 일정부분 감내하는 것인데, 그리고 이왕이면 아이에게 더 영양가 있는 모유를 먹이고 싶어 스스로 식단에도 신경 쓰게 되는 것인데 나는 그런 고민 없이 누가 시켜서 하는 것 마냥 불편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수유의 방법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된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아도 여전히 '모유가 좋다더라'는 식의 참견은 무례하게 여겨진다. 산모들마다 각자의 사정과 추구하는 육아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유의 영양을 우위에 두는 사람이 있겠지만 체력을 아껴 아이와 더 많이 놀아주고 싶어 하는 산모도 있고, 모유를 주고 싶지만 양이 부족하거나 다른 건강상의 이유로 줄 수 없는 산모도 있다.    

게다가 모유수유를 결정했을 때 따르는 수고와 불편은 온전히 산모 한 사람의 몫이다.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 산모는 혼자서 외출을 할 수도 없고 아이를 먹이는 노동을 남편을 포함해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식사에도 많은 제약이 따른다. 맘카페에는 '모유수유 중 OOO먹어도 되나요?'라는 질문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먹을 수 없는 것에는 산모의 개인적 선호가 있는 식품뿐 아니라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약물도 포함된다. 모유수유 중인 산모는 몸이 아파도 마음껏 약을 먹을 수도 없다.    

이러한 부담을 나누어줄 수도 없는 사람들이 조언의 형식을 빌려 큰 고민 없이 던지는 말은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되었더라도 월권이라고 생각한다. 모유수유의 장점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요즘 산모들은 다 안다.                

모유의 양과 질은 산모의 심리상태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부모님들이 모유수유를 권하실 때마다 나는 단유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 안의 청개구리 본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간섭만으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차라리 분유수유로 결정하고 수유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면 수유를 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하고 몸도 덩달아 더 힘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아무도 내 수유방식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무렵에야 비로소 아이의 오물거리는 입술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엄마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녀를 사랑한다. 자녀의 건강과 행복 앞에서는 어떤 희생도 감내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들에게서까지 자녀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기능'으로 취급받고 싶지는 않다. 내 아이의 건강은 내가 챙길 테니 나를 아이의 ‘밥통’이 아니라 그냥 '나'로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직 덜 자란 엄마의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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