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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Nov 26. 2019

문유석 판사가 우리 집에 왔다

아기와 단둘이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고립되지 않는 법

짧으면 10분 길면 2시간. 하루 중 내게 주어지는 자유시간이다. 아이가 잠든 그 시간에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그래도 시간이 허락되면, 책을 펼친다.


독서는 육아휴직을 시작하며 마음먹은 일 중 하나다. 직장에 다닐 때보다 여유가 생기리라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 권은 가뿐히 읽어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닥치고 보니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시간은 더 빠르게 간다. 직장에서는 서둘러 점심식사를 하면 최소 30분 이상은 편히 책 볼 시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밥을 먹으면서도 시선은 내내 아이에게 가 있다. 그나마 아이가 낮잠이라도 1~2시간씩 연달아 자주면 운이 좋은 날. 아이가 잠든 틈을 타 얼른 책을 집어 들고 식탁에 앉는다. 하루 중 온전히 나를 위해 쓰는 유일한 시간이다.


책은 주로 빌려서 본다. 요즘 이용하는 대여점(?)은 남편이 다니는 회사 자료실. 읽고 싶은 책을 남편에게 주문하면 4권까지 한 번에 빌릴 수 있다. 대여기간은 최대 4주다.

4주에 4권. 반납 전에 모두 읽으려면 매주 한 권씩 읽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아이를 재우고 책을 펼쳤다가 몇 줄 읽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깨버려 다시 접어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병원 가는 날이나 집에 손님이 오는 날은 그마저도 어렵다. 그런 날은 밤늦게 침대에서 책을 펼쳐보지만 역시나 몇 장 읽다 덮게 된다. 일단 몸이 피곤하고, 내일이 걱정되고, 또 책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남편과의 대화가 아직은 더 좋으니까.

결과적으로 한 권의 책을 길게는 보름까지 붙들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책이야말로 몸이 고립된 내게 세상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주로 생활하지만, 책을 통해 바깥세상과 소통한다. 육아라는 한정된 영역에 내 에너지의 대부분을 쏟고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다른 사고를 하고 생소한 감정을 느낀다.

최근에는 문유석 판사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판사유감'이라는 책을 먼저 읽고 '쾌락독서'라는 책도 연달아 읽었다. 에세이는 작가의 생각을 그의 목소리로 담은 책이다. 그래서 에세이를 읽다 보면 작가와 마주 앉아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문유석 판사가 쓴 두 권의 책을 읽고 나니 마치 그를 꽤 오래 알아온 것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매번 다른 사람들, 그것도 한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친절하게도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도 좋지만, 책을 통해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 느낌도 좋다. 대꾸할 말을 애써 떠올릴 필요도 없다.


즐겨 읽는 장르는 소설이다. 반복되는 일상과 매일 보는 얼굴들, 한정된 소재의 대화로 무료할 때 소설은 내 머릿속 작은 공간에 새롭고 재미있는, 때로는 감동적이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유쾌한 세계를 만들어주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설책을 펼치면, 정말 귀엽고 예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 보내는 가끔은 답답하다고 느껴지는 일상을 잠깐이나마 떠나 있는 기분이 든다.

역사는 아이를 가진 후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다. 학창 시절 역사과목을 기피한 탓에 역사상식이 부족해 한번쯤 공부해야지 마음먹었었다. 훗날 아이가 질문할 때를 대비해 최소한의 기초상식은 갖추자는 결심으로 한국사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이 덕분에 다시 시작하는 공부, 나름 재미있다.


남들의 육아는 대단하고 멋져 보였다. 아이의 몸집을 키우고, 기고 서고 걷는 발달과정을 유도해내는 것이 엄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서 하루를 돌아보면 나 스스로가 멋지다고 여겨지기보다 하는 일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 아이의 성장과 별개로 나는 나 스스로가 주인 되지 못한 시간을 허무하게 소비한 기분.

그럴 때도 독서는 괜찮은 처방이다. 몇 장의 책은 허무함을 덜어낸다. 독서 자체가 생산적인 활동이 되지는 못하지만, 나를 위해 온전히 소비하는 시간이라 독서 후에는 뿌듯하다.


퇴근 후 돌아온 남편에게 "오늘 회사에서 재미난 일 있었어?"라고 물으면 남편은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던 나를 위해 사소한 이야깃거리라도 떠올려 나누어준다. 그리고 미안함이 섞인 목소리로 되묻는다.

"자기는?"

"내가 재미난 일 있을게 뭐 있어. 하루 종일 애만 봤는데."라고 말하는 대신 오늘 책에서 읽은 꽤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남편이 오면 얘기해줘야지 했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남편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내게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어쩌다 보니 독서 예찬론자처럼 글을 썼는데, 사실 나도 책보다는 영화나 드라마가 훨씬 재미있다.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라 부득이 책을 주로 보지만. 아마 내게 3시간짜리 자유시간이 생기면 당장 책은 내팽개치고 극장으로 달려가지 싶다.


아. 한 가지 빠뜨린 독서의 장점이 떠올랐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 곧 잠이 들더라. 그래서 종종 아이 옆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아이가 책 읽는 내 입모양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이 슬슬 감길 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른다.

책 읽는 엄마를 보며 내 아이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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