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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Jul 25. 2021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박혜윤 - 『숲속의 자본주의자』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한 몸이라도 간수하기 위해 먹고사는 일은 누구나 힘들다.



  후회가 없으려면 회피해서도, 남에게 선택을 위탁해서도 안 된다. 내 삶을 내 힘으로 꾸려가려면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도시를 등지고 숲으로 들어간 이 저자는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그 명제를 담담하게 이행한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배움을 녹여낸 삶은 숲을 닮아 무심해 보인다. 숲속까지 공기처럼 퍼져있는 자본주의의 숨결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에서 어떻게 '나'로 존재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은 무심함보다는 치열함에 가깝지만 말이다.


  저자가 숲으로 향하는 과정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과거 기자일 때에도 특종을 거대한 지면에 실으려는 욕심보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했고, 숲으로 간 뒤에도 수요가 있는 빵을 굽기보다는 공급하고 싶은 빵을 굽고자 했다. 저자가 이런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저 '나'가 되기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나'가 되는 방법은 쉽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그 일을 내가 좋아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 다만 그 일이 무엇인지, 또 어느 정도가 내 효용의 극대화 지점인지 알아내는 과정이 어렵다.


  난 한평생 나로 살아왔으면서도 나를 잘 모른다. 우선, 사회 문화적 맥락이 나라는 인간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온전히 나만 읽어내기가 힘들다. 한국에서만 자란 난 한국 사회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수준을 (나도 모르게) 충족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게 나의 만족감과는 관계없이 때로는 큰 성취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예컨대, 대입을 준비하던 때 진학하고 싶은 과도 이루고 싶은 꿈도 없으면서 공부는 열심히 했다. 그 결과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 성취감은 인생을 통틀어 가히 가장 격렬한 감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물론 관심 없는 학과 수업을 들으며 금세 식어 내렸지만.


  이를 경험한 뒤론 나를 실망시키고 만족시키는 일을 찾는 작업에 몰두했다. 대체로 날 실망시키는 것들은 한국 사회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좋은 학벌, 좋은 거주 공간, 좋은 직업 같은 것들이었다. 남들은 좋다 하는데 난 왜 좋은지 모르겠는 것들. 그런 것들을 제하자 날 만족시키는 것들은 더욱 쉽게 보였다. 남들이 보든 말든 내 마음대로 그리는 그림, 쓰고 싶을 때마다 쓰는 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조용히 걷는 산책. 이런 것들을 할 때야 난 비로소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마치 저자가 손님이 좋아하는 스콘보다 본인이 좋아하는 발효 빵만 판매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일은 사회적 맥락을 걷어내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그리고 저자 말대로 이런 사회적 맥락은 한국에서는 맞고 다른 나라에서 틀리듯 어느 곳에서나 먹히는 절대적 특질이랄 게 없다. 맹신할 필요가 없으니 가뿐히 무시할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저자와 다르게 마음이 좁아서 글과 그림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가끔 서운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면, 친구들은 의아하단 표정이었다. 대기업 취준도, 금융권 취준도 모두 그만두고 향한 곳이 수입도 짜고 비정규직이 드글드글한 그런 곳이라니, 라는 듯한 표정. 심지어 회계는 답이라도 있었지, 글과 그림에는 답도 없다. 그럼에도 이 일을 꿋꿋이 이어나가려 노력하는 건 난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단순히 '나'만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인정하자 편해졌다. 난 원래 사회가 내게 매기는 경제적 가치보다도, 내가 내 일에 매기는 가치가 더 중요한 사람이란 사실을. 저자는 스스로가 되기를 원하고 행동할 때 능동성이 생기고, 그럼 남 탓도 사회 탓도 줄어든다고 했다. 모든 건 나의 선택이므로, 책임도 전적으로 나의 몫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세상에 불만이 좀 줄었다. 망해도 세상이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나'인 탓이다. 이건 뭐 바꿀 수도 없는 거니 받아들이는 게 속 편하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긴 했는데, '좋아하는 만큼' 하는 방법은 여전히 모르겠다. 저자는 '아무렇게나, 언제든 그만둬도 된다는 마음으로' 한다고 한다.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난 후회가 많아서 결과가 좋지 않으면 밤마다 누워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달라졌을까 상상하는 편이다. 새벽을 넘어 이어지는 이런 미련은 건강에 별로 좋지 않다. 그러다보니 이왕 하는 일들은 최선을 다하는 게 내게 더 잘 어울린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때때로 의욕이 앞서 좋아서 시작한 일이 싫어지는 때도 종종 있다. 여전히 '좋아하는 만큼' 하는 법은 내게 연구 대상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찾는 과정 중 숲으로 떠났지만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굳이 숲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 빛나는 도시의 어둡고 허름한 방 한 칸이라도 상관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번듯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런히 내려놓으면 된다. 그 욕구가 빠져나간 공간에 들어차는 것은 오롯이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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