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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Jul 31. 2021

혐오로 세운 경계로서의 집

김혜진 - 『불과 나의 자서전』

서울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매물도 잘 나오지 않는 요즘 같은 때, '집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들은 어쩐지 거주공간으로서의 집보다도 계급적 지표로서의 집을 더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네에 대한 인식이 담보하는 사회적 지위이자 가시적 지표, 즉 누가 누구와 같고 다른지 분명하게 나눌 수 있는 경계로서의 집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집의 수준에 따른 차별은 근사한 집을 선망의 대상으로, 그렇지 않은 집을 경시의 대상으로 가뿐하게 재단해버리는 일과도 같다.


그렇게 납작한 시선으로 집을 바라볼 때 우린 필연적으로 기득권층과 피기득권층으로밖에 나뉘지 않는다. 역설적인 점은 피기득권층도 기득권층 못지않은 성실함으로 그런 분할과 소외의 논리를 답습한다는 점이다. 피기득권층이 스스로를 배제하는 논리의 유지에 기여한단 점은 의아하다. 하지만 피기득권층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 논리의 허점을 꼬집을 때가 아니라 논리를 충실히 외며 기득권층으로 도약하려 노력할 때 더 쉽게 실현 가능하단 점을 염두에 두면 이해가 간다. 구조의 허점을 수정하는 것보단 구조의 모순을 수용하고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분명 더 편리하니까.


마치 ‘나’의 아버지가 경매로 이웃의 집을 얻어내자마자 그 사람들이 집을 잃은 것은 무능함 때문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처럼, 그 집이 행정 개편되어 가난의 상징인 남일동에서 우연히 벗어나자마자 남일동 사람들이 문제라고 혐오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구조의 모순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으면서도 그 문제점을 수정하려 하기보다 그대로 수용하고 답습함으로써 재생산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학습하면서도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지한다. 친구인 주해가 딸 수아를 근사한 동네인 중앙동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할 때 "저희가 남일동이 아니라 중앙동에 살았어도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라고 화를 내듯, 직장에서 따돌림 당하던 동료를 곱씹으며 "작은 여행사에서 큰 여행사로 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였다고 해도 그렇게 가혹하게 대할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차별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알레르기를 얻는 '나'는 아버지와는 다른 시각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변화는 문제점을 인식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마지막에 '나'가 "발끝을 세우고 두 눈을 크게 부릅" 뜨고 남일동을 바라보는 것은 구조적 문제점과 그로 말미암은 혐오의 재생산을 응시하는 것과도 같다. 그제야 나는 어린 시절을 보낸 남일동을 바라보며 여러 세대를 걸쳐 이어진 혐오 답습의 고리를 응시하는 것이다. 변화는 그렇게 실재 속에 감춰진 문제점을 직시할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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