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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Aug 04. 2021

무색 무취 무향 무형 무미의 크림 맛 보기

무라카미 하루키 - 『일인칭 단수』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이번 단편 소설집은 아껴 읽고 싶었는데 여름의 낮이 생각보다 길어서 해가 지기 전에 다 읽어버렸다. 하루키 특유의 능청스러움은 마음을 당기는 힘이 있다. 힘을 좀 빼고 쓴다고 해야 하나,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 주장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아는 체 하지 않는 겸손함이 한번쯤 들어보고 싶은 인내심을 갖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소설가라는 직업은 관객이 필요한 직업이니 구미를 당기게 하는 문체는 여러모로 소설가로서 유리한 것 같다. 일단은 나도 하루키의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곧바로 또 다른 하루키 책을 주문한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읽고 나니 하루키의 세계에 (자발적으로) 갇힌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슬그머니 든다. 과도한 성적 묘사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뻔뻔한 문체로 어떤 기묘한 이야기를 또 써내리는지 더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소설가로서는 꽤 큰 이점인 그런 매력이 있다. 


하루키 스스로 장편 소설가라고 말하고 다녀서인지 이번 소설집에 포함된 단편도 미진한 끝 맛을 남기는 것들이 더러 있다. 독자인 난 얇은 장막 뒤로 소외당하는 기분이긴 하지만 그것들이 미래에 하루키의 상상을 거쳐 또 어떤 모습의 장편으로 튀어나올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우선 지금은 미스터리한 단편 자체에 만족하기로 했다. 「크림」도 그런 단편 소설 중 하나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대장을 받고 정자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을 만나는 이야기다. 기기묘묘한 분위기 속에서도 메시지는 제법 명확하다.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떠올리는 일'처럼 '어떤 가치가 있는 것치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 진로를 찾는 과정이 꼭 그런 일 같아서 더 와닿는다. 미래의 난 그런 형태일 것이 분명하다.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 미래의 미래에도 그럴 것 같다. 그러니 올여름의 숙제는 우선 그런 원을 부단히 그려나가는 것인 셈이다. 시간을 쏟아 그 일을 해내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된다고 하니, 현재는 그 크림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해야지.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하루키의 자전적 내용이 분명 담긴 것 같은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재현예술인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려놔서 읽는 내내 괜스레 흥미진진하다. 또, 하루키 특유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기에 보잘것 없는 야구 만년 꼴찌 팀의 매력까지 찾아내는 하루키의 섬세한 시선이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도 어렸을 때 남몰래 좋아하는 인디 가수들이 있었는데,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들의 노래에 대해 시시콜콜 떠들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저런 무심한 다정함이라면 유명하지도 않은 그 사람들 노래에 대해 종일 떠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현실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어서서 능청맞게 스토리를 전개하는 관록이 묻어난다. 이런 상상력은 어른을 위한 동화 같기도 하고, 좀 씁쓸하게 유쾌하기도 하다. 하루키의 문장을 신뢰하는 독자로서는 정교한 세계려니 믿고 읽는 맛이 있다. 비현실적인 설정으로도 마냥 유치하지 않은 것도 매력이다. 난 왠지 모르게 이런 오컬트적인 소재에 끌린다. 예전에 읽었던 단편 소설집인 『반딧불이』에서도 코끼리 공장을 다룬 「춤추는 난쟁이」가 가장 좋았다. 그냥 타고난 취향이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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