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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Dec 08. 2021

난관과 또 다른 난관의 균형, 낙관의 규칙으로 뒤집기

이소정 -「밸런스 게임」(2021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우리 조금만 더 용기를 내자.


난관만 닥치는 삶에서

개인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나


  밸런스 게임은 ‘난관’과 ‘그와 비슷한 또 다른 난관’만을 선택지로 제시한다. 삶 역시 난관 넘어 또 난관이라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개인이 선택의 주체가 아닌 객체라는 점에서 삶은 개인이 선택의 주체인 밸런스 게임보다도 못하다. 우연한 사고 그리고 우연한 죽음, 그 죽음에서 비껴나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우린 이를 선택할 수 없으므로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이 소설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난관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객체로 전락한 개인이 난관을 통과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렇게 고르고 싶지 않은 선택지만 내미는 삶 속을 헤쳐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난관의 선택지만 있는 밸런스 게임의 규칙을 초월해 낙관의 규칙으로 삶을 뒤집는 용기 말이다.


  동생이 죽은 후 애정 결핍이 된 건희와 단둘이 사는 엄마 윤. 윤은 건희의 동생이 죽은 충격으로 남편과 별거를 시작하고 건희에게 관심을 쏟지 못한다. 소설은 윤의 시선에서 사건을 풀어내며 건희를 문제아 취급하지만 건희는 문제아라기보다 난관을 겪으며 상처받은 인물이다. 건희의 깊은 속내를 읽지 못하는 어른들의 납작한 시선에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문제아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건희는 장래 희망란에 무조건 "힘센 사람"이라 적고, 윤은 "단지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아들을 걱정한다. 건희에게 힘이 세다는 건 외로운 사람의 곁을 지키는 일이다. 임신한 개가 혼자 외롭지 않도록 토끼장에 넣어주는 것처럼. 이는 동생이 죽은 뒤 줄곧 외로웠던 자신을 임신한 개와 동일시하며 벌어진 사건이지만 학교에서는 전대미문의 섬뜩한 사건 취급을 하고 윤 역시 건희를 이해하지 못한다.


  건희는 동생이 죽은 후에도 "동생 아니면 나" 하는 식으로 엄마인 윤에게 밸런스 게임을 던진다. 동생이 죽은 뒤 그 게임을 풀기 위해 건희는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외로움을 단속해야 했을까. 건희가 이런 질문을 엄마에게 던지는 것은 죄책감의 발로다. 동생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동생 대신 살아남았다는 데에서 오는 책임감. 그렇지만 죄책감을 견디고 있는 사람은 건희뿐만이 아니다. 윤 역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윤은 소설 말미에서 "아이에게 잘해주면 죽은 아이를 배신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건희를 방치했고 오랫동안 사탕은 엄마의 사랑 대신이었다."라고 밝힌다. 윤도 자신의 죄책감에 대한 괴로움으로 아들인 건희의 죄책감을 돌보지 못한 것이다.


  건희는 뜬금없이 엄마에게 "우리 선생님 엄마 줄까요?" 하고 묻기도 한다. 당황해서 "어떻게"라고 묻는 윤에겐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라고 답한다. 기괴한 문답이다. 건희의 해괴한 질문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윤이 학부모 수업에 가지 않는 대신 담임에게 건희를 돌보는 일을 위탁했기 때문이다. "담임의 전화를 받은 날이면 건희에게 잘했어, 라고" 칭찬하고, "담임의 이해"를 얻지 못한 날이면 건희에게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꺼내지 않는다. 그러니 건희는 임신한 개를 토끼장에 넣어놓듯 윤에게 선생님을 붙여놓고 싶어 한다. 개가 토끼를 잡아먹는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담임과 윤의 관계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를 붙여둠으로써 윤과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것이다.


  동생의 우연한 죽음 그리고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가족들. 이처럼 난관뿐인 인생을 헤쳐나가야 하는 객체로서의 개인은 나름의 방식으로 모두 괴롭다. 그렇지만 이미 결론이 난 밸런스 게임은 수정할 수 없다. 죽은 아이를 되살릴 수 없듯 객체인 인간은 주체인 신의 결론에 순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지를 고르려 해도 다른 가능성은 이미 제거되었으므로, 주어진 현실에는 그저 "누군가 머리와 턱을 동시에 잡고 흔드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난관의 밸런스 게임 뒤에는
낙관의 규칙으로 새로운 밸런스를


  윤은 건희의 문제로 상담받으러 간 학교에서 빠져나온 뒤 선생과 여자아이가 밸런스게임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뽀뽀하기? 뽀뽀 받기?"


  학부모라면 경기를 일으킬 만한 '선생과 미성년자의 부적절한 관계' 목격하고도 윤은 어떤 윤리적 문제도 감지하지 못한다. 대신 소설은 밸런스 게임의 규칙을 뒤집는 법을 제시한다. 난관과 그와 비슷한 난관만을 제시하는 밸런스 게임에 사랑의 규칙을 집어넣는 것이다. '뽀뽀하기' '뽀뽀 받기' 모두 사랑하는 일이고 이는 난관이 아니다. , 여자아이와 선생이 주고받는 밸런스 게임의 문답에서 주체는 그들뿐이다. 주체인 신이 난관만 제시하는  밸런스게임과는 아주 다르다.


  누구도 막지 못한 죽음에 관하여 윤과 건희는 선택의 참여에서 소외된  결과를 받아들이는 객체로 자리매김한다. 객체는 억울하다. 선택한 적도 없으며 그 이유도 알 수 없는 우연이라는 난관 앞에서 바꿀 수 있는 것조차 없다. 그러니 윤은 "당신은 어디에 있었냐고" 신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윤은 절망할 때마다 " 안으로 한꺼번에 검은 물이 쏟아져 들어와 몸이 잠기는 " 느낀다.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난관과  다른 난관  하나에 굴복하고 마는 삶처럼.


  소설은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고 느끼는 윤이 "너무 많은 물속에서 몸이 균형을 잡으려는 것처럼" 목말라하며 끝난다. 이는 소설 중간에 잠시 등장했던 마트 장면에서 윤이 물 마실 시간도 없이 일하면서 계속 목 말라하던 때를 연상시킨다. 그때 윤은 물을 마시러 가겠다고 말하지 못했던 이유를 "배려가 아닌 권리를 말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난관을 피하는 일은 권리의 층위를 넘어서 있다. 난관을 장관하는 주체도 배려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도 오로지 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은 자비가 없다.


  다만 우리에게 권리가 있다면 그건 난관뿐인 밸런스 게임의 밸런스가 아닌 곳에 있다. 다시 말하면, 선생과 여자아이의 문답처럼 "사랑받기 사랑하기"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에만 있다. 난관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사랑은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고통은 선택할 수 없지만 행복만큼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체적으로 사랑을 선택해 나아갈 때 비로소 난관뿐인 인생의 밸런스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난관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행복과 사랑을 선택할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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