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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Dec 23. 2021

퇴사하면 우리 친구 아니에…야?

전 직장 동기들과의 평어 체험기

인턴 계약이 끝났고 동기들과 한 발짝 더 가까워지기로 했다. '회사 동기'라는 궤도에서 벗어나 '친구'의 궤도로 진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궤도에 머무르려는 관성은 그 궤도를 벗어나려는 의지보다 강한 걸까? 우리 셋은 번갈아 집들이하며 각자 키우는 고양이˙강아지와 안면을 텄고, 주말에 함께 미술관에 다녀오기도 했고, 겹치는 친구까지 찾아냈으니 다음 궤도로 넘어가는 것쯤이야 아주 가뿐할 줄 알았건만……습관이 되어버린 존댓말 때문에 다 망했다.


지난 육 개월 동안 서로의 이름 뒤에 '씨'를 붙여 어른 흉내를 내며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동기라면 편하게 말을 놓았던 대학생 때와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이건 뭐랄까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 그렇다 우린 이젠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인 것이다, 아아 그야말로 성장의 증표인 것이다 싶은 예바른 문법이었고, 아직 학생 티를 덜 벗은 내게 그런 새로운 관계의 맺음새는 제법 멋있어 보였다.


"저희 슬슬 말 놓을 때가 됐죠?"


이런 주제가 나온 건 퇴사하고 한 달이 지나서였다. 존대하기엔 꽤 내밀하고 무람없이 굴기엔 아직 조금 먼 사이. 사회에 살짝 발만 담가본 계약직 인턴이었다 해도 그것이 퇴사 한 달 차 전 직장 동기 사이였다. 그렇지만 어른이라면 변화를 무릅쓰고서라도 친구를 사귈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우린 단숨에 새로운 말투의 규칙을 정했다.


'씨'는 내버려 두고 반말 쓰기.


우리 중 한 사람은 나머지 두 명보다 한 살이 많아 말을 놓으려면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해야만 하는데 '언니'라는 단어는 듣는 입장에서는 어딘가 부담스러워지고 부르는 처지에서는 상대방이 멀어지는 듯한 어감이 있다. 그래서 'OO 씨'라는 호칭은 바꾸지 않은 채 말을 놓음으로써 더 친근해지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 존댓말 쓰는 사람이 밥 사는 거라고 서로 겁주면서, 어미를 미묘하게 바꾸는 것만으로도 더 가까워질 수 있단 사실을 기꺼워하면서, 이 규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놓을지 사뭇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 규칙은 시작 한 시간 만에 내가 존댓말을 쓰면서 일차적으로 망했고, 그다음엔 모두가 존댓말만 사용하는 바람에 완전히 망해버렸다. 만날 땐 반말을 쓰다가도 연락을 주고받을 때면 번번이 존댓말로 되돌아갔고 우리의 '회사 동기' 궤도 이탈 작전은 자꾸만 존댓말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저희 어른 다 됐나 봐요, 한탄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을 여전히 젠틀하게 나누지만 '친구' 궤도 진입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손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내용을 즐겨 붙이는 우리들의 농담은 반말일 때 더 재미지다. 


다음 만남은 2022년 신년회.

여러분, 존댓말 쓰면 밥 다 사는 거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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