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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Dec 27. 2021

복제인간과 인간은 다른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가

가즈오 이시구로 - 『나를 보내지 마』

마치 왔다가 가 버리는 유행과도 같군요. 우리에겐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인데 말이에요.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점을 찾고 그 차이점을 근거로 상대방이 열등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내 정체성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면, 참으로 인간적이다. 반목은 인간성의 근원이다. 인간은 이런 인간적인 이유로 복제인간을 인간 대우하지 않는다.


소설 속 복제인간들은 특정한 곳에서 사육되거나 훈육되며 성인이 된다. 그리고 ‘기증자’로서 인간들에게 자신의 장기를 목숨을 잃을 때까지 내주는 삶을 산다. 그 삶 속에서 복제인간들은 마치 인간처럼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인간들이 복제인간을 만든 목적인 장기 기증이 아니라 죽음까지 이르는 생의 시간이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때 복제인간은 도구의 기능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의미를 탐구한다. 복제인간에게 인간과 같은 그릇을 주었다면 그 그릇엔 담기는 영혼 역시 자연스레 생겨나는 걸까? 소설은 복제인간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포착하며 과학이 약속하는 미래에 우리가 묻게 될지도 모르는 질문의 과정을 함축해 보여준다.


처음 읽을 땐 복제인간들의 이야기란 걸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몇십 장에 이를 때까지도 기묘하게 통제되는 보육원의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마치 얇은 장막을 들어 그 너머를 보여주는 것처럼 ‘기증’이라든가 ‘복제인간’이라든가 하는 단어를 찾고 나서야 주제가 무언지 깨달았다. 겉모습은 인간과 같으나 삶의 목적은 ‘장기 기증’ 한 가지뿐인 복제인간. 이 소설에서 인간성은 영혼의 존재, 그리고 클론성은 영혼의 부재로 인한 삶의 의미 결여로 나타난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찾는 영혼이 인간성의 증거라면 이 주인공들의 순도 높은 고민 역시 그러한 인간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또한, 이러한 고민 없이 살아가는 인간 역시 얼마나 많으며 그건 또 현대적인 의미에서 새롭게 파생된 인간성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 소설 속 주인공인 캐시가 토미와의 사랑을 증명함으로써 영혼을 증명하고 기증을 미루고자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육체라는 그릇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결합이며,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 존재의 그릇엔 필시 영혼이 깃들어 있다. 문제는 복제인간을 주변부로 몰아낸 인간이 이 사랑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다. 사랑이 인간성의 증명인 만큼 반목 역시 인간성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저들을 좀처럼 인간과 동일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복제인간은 장기를 이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도구가 도구를 뛰어넘으려 하는 오만한 행동을 인간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제인간인 캐시와 토미에게도, 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도 삶은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젠 인간들이 그 의미를 갈구하는 만큼 미래의 과학적 산물 역시 그 의미를 갈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래의 인간들은 복제인간들에게 본래 목적과 어긋난 의미를 허락할 수 있을까. 그게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새롭게 정의될 ‘인간성’일지 상상해본다. 그 '인간성'은 어쩌면 구시대적 인간성으로 치부될 ‘반목’을 뛰어넘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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