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ickypinkpiggy Dec 31. 2021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우린 무언가 뛰어넘을 수 있다

한강 - 『작별하지 않는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누군가의 상처를 기꺼이 짊어지는 건 사랑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상처를 짊어지기 위해선 상상력과 힘이 필요하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상상력, 그리고 상처를 들여다볼수록 커지는 고통을 인내하는 힘. 이 소설은 사랑을 위한 상상력과 힘을 가르치는 소설이다.


제주 4.3사건을 통해 인간의 양면적인 본성을 확인한다는 건 마치 "파르스름한 어둠과 빛의 사이"로 들어가는 일인 것 같다. 한 인간이 그토록 다른 인간에게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학살, 그리고 그 학살을 겪은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참혹한 면면을 끈기있게 들여다보고 수집하고 기억하는 '인경'의 사랑, 이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는 시간을 초월해 내 마음 깊숙한 곳으로 온다. 그래서 한강 작가는 사랑하는 게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사랑에 대해 상상하느라 먹먹하고 서걱거려서 무참했다. 불과 몇 십 년 전,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렸을 적, 혹은 우리 할머니가 어렸을 적 경험했을 폭력의 세계에 대해 상상해봤다. 나의 두 세계를 이루고 있을 그것에 대해 상상하다보면 명치께에서 분노가 끓고 무게도 없이 가벼운 흰 눈의 입자가 피부에 닿아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피부의 뜨거움과 눈의 차가움 사이에서 혼재하는 두 세계. 그 폭력을 아는 그들과, 겪어본 적 없는 내가 한 식탁에 둘러앉아 오늘의 날씨를 이야기하며 고기를 굽고 갈비뼈를 바르고 떡국을 먹는다는 게 일순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모르는 그 세계에 대해 난 힘껏 상상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상상하고 기억하는 일로만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심'과 '인선' 역시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 한다. 오빠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오빠가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숱한 고통의 흔적을 수집했을 '정심'과 그런 '정심'을 헤아리기 위해 '정심'을 돌보며, 토막 잠을 깨우는 '정심'을 다독이고 밀치며 그 수집을 열어보고 아버지의 역사를 추적하는 '인경'. 어떤 사랑은 그렇게 태어나나 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태어나나보다. 그게 고통인지도, 다다를수록 더 커지는 고통인지도 모르고 손을 맞잡고 가는 것,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영역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야말로 사랑인 것이다.


인간의 진실은 무엇일까. 모든 전쟁 과정에서 신대륙에게 제국주의가 가한 어떤 공통적인 폭력의 양상, 불필요할 정도로 집요하게 잔인했던 학살. 그들도 '정심'도 '인경'도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 '정심'과 '인경'은 사랑으로 그 고통을 이해하고 기억함으로써 애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 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양면적인 본성을 선명하게 대조해 보여준다. 잔혹함과 사랑 사이엔 무엇이 있는가. 어둠과 빛 사이의 푸르스름한 박명엔 인간의 진실이 녹아 있는가. 그렇다면 박명은 언젠가는 빛으로 덮이지 않는가.

작가의 이전글 복제인간과 인간은 다른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