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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Jan 02. 2022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다

줄리언 반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기억은 과거를 주관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오직 내 편의대로 윤색되고 왜곡되는 과거는 '기억'이란 형태로만 머릿속에 기록된다. 그렇다면 기억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 토니는 노년에 접어들어서야 이런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40여 년 전 친구였던 에이드리언이 자살한 원인을 깨닫는다. 에이드리언은 자신 때문에 자살했던 것이다. 이는 반성적 성찰이 결여된 인간이 어떻게 한평생 비슷한 실수만 반복하며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토니는 평범한 삶을, 평균 정도의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비록 이혼하긴 했지만 전처와 사이도 좋은 편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딸이 있다. 20대 시절, 에이드리언이 자신의 전 애인인 베로니카와 사귀는 바람에 마음의 상처를 입긴 했지만 쿨한 척 보내줬다. 이게 바로 토니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던 모습이다. 그렇지만 진실은? 토니는 60대에 들어서 베로니카를 통해 40여 년 전 자신이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편지의 복사본을 받는다. 그 편지의 내용과 기억의 낙차는 기억이 얼마나 자기 편의적인지 보여준다. 토니는 비로소 어렴풋이 에이드리언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걸 짐작하지만 이 소설에는 쓰여있는 이야기보다 쓰여있지 않은 이야기가 더 방대해 보인다. 토니의 관점으로밖에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토니는 여전히 자기 편의적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한평생 그랬듯이.


하지만 어느 누가 '자기 편의적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대한민국 마음보고서』에서는 '우울한 사람은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는 사람이며 생존하려면 자기 기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억의 윤색이 자기 보존 본능과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에이드리언이 자기 보존을 포기하고 자살한 이유, 그리고 토니가 60살이 넘어서까지 스스로 꽤 후한 평가를 주며 살았던 이유는 이런 점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이 사유를 통해 진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한 반면 토니는 진실을 회피하고 현실적으로 살기를 택한 점 역시 그렇다. 그래서 토니는 아무런 악의 없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고, 타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소중한 인연을 놓치기도 했으며, 모험할 기회를 회피한 채 현실적인 선택만 반복하다 노년을 맞았다. 아, 가장 소중히 여기던 친구까지 자살로 내몰았기도 하다.


토니가 편지의 내용을 올바르게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래서 편리한 자기 기만적 합리화라는 실수를 하지 않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면 토니의 삶은 완전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에이드리언이 토니에게 "영국 사람들이 진지해야 할 때 진지하지 않은 게 싫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진의를 고민했다면 농담같은 한 마디로 에이드리언을 잃진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오직 진실에 가닿으려는 태도만으로 간신히 진보한다.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 역시 그래야만 한다. 토니에게 필요한 것은 반성적 성찰이었다. 자신이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난폭한 편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던 20대 때 곧바로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을 테고, 자신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사과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 사과는 상처받은 베로니카와 베로니카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중요하기도 하지만 토니 자신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과할 줄 안다는 건 반성적 성찰을 행동으로 옮길 줄 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인간은 간신히 나아진다. 그리고 그 미묘한 변화로 삶은 달라지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 할 때 인간은 비로소 진보한다.


이 책의 제목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지만 토니의 예감은 번번이 빗나간다. 과거를 왜곡해 기억하는 사람의 예감이 맞을 리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토니의 예감은 또다시 빗나간 것이다. 그러니 예감하기 전에 우린 성찰해야 한다. 스스로 어떤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직시해야 한다. 편리한 자기기만에서 벗어날 때 우린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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