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날개도 뒤틀려 있고. 죽은 것 같았어. 묻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은행나무 주변에 구덩이를 팠어. 비둘기를 넣고 흙으로 막 덮으려는데, 갑자기 비둘기가 꿈틀대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어?”
(…)
“기억이 없어. 너는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
“살리려고 노력했더라면. 그 기억은 남아 있겠지.”
(…)
진영은 이번에도 잊고 있던 장면이 눈앞에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진영만이 진영을 쳐다보며, 진영만이 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 「희고 둥근 부분」 중
관계는 자잘한 오해와 이해가 포개지며 이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떤 오해도 없이 ‘온전한 이해’만으로 이을 수는 없다. 누군가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자웅동체가 불가능한 요즘 같은 세상에) 가능하기나 한가. 그러니 모든 관계엔 필시 크든 작든 오해가 섞여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오해는 곧잘 염증의 원인이 된다. 인간관계에 염증 마를 날 없는 건, 관계의 본질이 오해라는 허약한 토대 위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린 그 오해 때문에 타인에게 특정한 역할을 기대하기도 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어떤 역할을 연극하려다가 내면을 갉아 먹기도 한다. 이런 오해투성이 관계를 지켜나간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소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다.
<희고 둥근 부분>에는 자살 시도를 하는 학생인 ‘민채’를 돌보는 선생님 ‘진영’이 나온다. ‘민채’를 도와주고 싶었던 ‘진영’의 섣부른 판단으로 ‘민채’는 자살 시도를 반복하고 손목의 힘줄까지 끊는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계약직이었던 ‘진영’은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 해고당한다. 이로 인해 미주신경성 실신을 반복하던 ‘진영’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조금씩 ‘민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비둘기를 묻으려 했다는 친구의 말을 통해 자신이 민채를 어떻게 대하고 있었던 건지 되돌아본다. 자신이 ‘민채’를 상담 센터에 보내려고 했던 게 정말 민채를 살리려던 노력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였는지, 오직 자신만이 답을 아는 문제에 골몰한다.
이 문제의 답을 찾는 건 ‘진영’ 자신을 위해 중요하다. 선의 역시 오해의 부산물이었다는 걸 깨달을 때 ‘진영’은 한 발짝 더 전진할 수 있다. 그때 ‘진영’은 ‘민채’가 유서에 쓴 “하는 척은 할 만큼 했다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더 아프게 곱씹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기억을 되짚고 나서야 ‘진영’은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균질하지 않았던 오해를 재평가하는 행위는 “회복을 염원하는” 사람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