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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Jul 21. 2022

날마다 조금씩 행복해지고 슬퍼지는 누군가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 『사랑의 역사』

"날마다 너는 조금씩 행복해지고 조금씩 슬퍼지는데, 그래서 너는 지금, 바로 이 순간, 네 평생 가장 행복하고 또 가장 슬픈 거야."
(...)
"넌 어떤데? 넌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하고, 또 가장 슬프니?"
"물론 그렇지."
"왜?"
"그 무엇도 나를 더 행복하게, 더 슬프게 하지는 못하니까, 너 말고는."



오랜만에 진짜 연애하고 싶게 만드는 책을 찾았다. 파리의 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J에게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비행시간이 아주 길어서 토막잠을 자면서도 천천히 오랫동안 읽을 수 있었다.


사람으로 인해 생긴 슬픔은 사람으로만 회복될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의 역사가 품고 있는 가장 큰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슬퍼지던 사람도 날마다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날마다 조금씩 슬퍼지고 행복해지던 소년이 슬픈 노인이 된 뒤 어떻게 다시 행복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 회복에 다다르는 긴 과정을 미스터리의 형식으로 세 명의 화자를 통해 전한다. 처음에는 그 세 명이 어떻게 연관되어있는지 알기 어렵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세 명의 관계는 정교하게 그려진다. 독자는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역사'의 추적에 동행한다.


"진화라는 개념은 너무 아름답고도 슬프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난 이래로 지금까지 오십억에서 오백억 정도의 생물종이 생겨났는데, 그 중 겨우 오백만에서 오천만 종 정도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니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종의 구십구 퍼센트는 멸종한 것이다."


그러니 진화의 역사라는 건, 살아남은 일 퍼센트가 죽은 구십구 퍼센트를 추모하는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는 사랑했던 소녀를 어린 시절에 떠나보낸 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채 노인이 된 소년이 나온다. 그 노인은 마찬가지로 노인이 된 소녀가 죽은 뒤로도 그 소녀를 사랑한다. 그러니 진화의 역사가 아름답고도 슬픈 만큼, 사랑의 역사 역시 아름답고도 슬플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일 퍼센트가 죽은 구십구 퍼센트를 추모하는 진화의 역사처럼, 살아남은 이 (혹은 남겨진 이)는 죽은 이 (혹은 나를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수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년이 노인이 될 때까지의 시간 동안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감당해야 했던 외로움은 대체 얼마나 컸을까. 노인이 된 소년은 소설 말미에 이르러 말한다.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난 이 나무보다 나이가 많고, 이 벤치보다 나이가 많고, 비보다 나이가 많다. 그렇긴 하지만. 난 비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다. 비는 오랜 세월 동안 내렸고 내가 간 뒤에도 계속 내릴 것이다."


누군가 떠난 뒤로도 계속 내리는 비처럼, 소년은 노인이 되어서도, 사랑했던 소녀가 자신을 떠난 뒤로도, 노인이 된 소녀가 죽은 뒤로도, 그 소녀를 사랑했다. 그것이 사랑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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