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 『다른 방식으로 보기』
우리가 현재를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광고가 소비 욕망을 자극하기 전부터 우린 그런 시각언어에 익숙했다. 바로 유화 때문이다. 광고의 선조에는 유화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복제가 가능한 데다가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된 광고'가 어떻게 '순수예술인 유화'와 동일선상에 놓일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화의 가치가 역사가에 의해 신비화된 것뿐이라 그 목적이 상업적 목적과 다르지 않고,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원본의 가치가 예전과 같지 않다면 어떨까. 이처럼 존 버거는 광고와 유화가 사용하는 시각언어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며, 현재(광고)를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과거(유화)에 대해서도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냐고 주장한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첫째 장에서는 시각언어의 쓰임과 회화가 신비화되는 과정, 두 번째 장에서는 신비화된 유화의 사례, 세 번째 장에서는 광고의 성질이 유화의 본질과 얼마나 비슷한지 다룬다.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를 신비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관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물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 신비감이란 사실 헤아릴 수 없는 부(富)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대중들은 진품 걸작이란 물질적인 측면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부자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엘리트들에 의해 기록되고 평가된 유화의 역사는 신비화되다 못해 성물처럼 여겨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흥미로운 건 성물이라면 세속과는 멀리 떨어져 신비화되는 것인데, 유화는 시장가격으로 고평가를 받음으로써 성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는다는 점이다. 신비화된 성물마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이다. 아니, 실은 유화가 사용하는 시각 언어가 허영심의 발로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 정물화, 부동산 등 온갖 비싼 재산을 그려 응접실에 걸어놓았던 그림에서 허영심 이상의 고귀한 정신적 의미를 읽어내는 신화화가 억지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유화는 광고의 선조 격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광고는 이렇게 유화의 시각적인 언어에 깊게 의존하게 되었을까.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유화든 광고든 사유재산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선망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화가 예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존 버거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힌트를 준다.
"대략 열여섯 살때부터 전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에 적합한 작업 방식을 공부했던 도제나 학생이 예외적인 화가가 되려면,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시각의 중요함을 깨닫고 전통적인 관습이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시각을 키워 나가야만 한다. (...) 이 말의 의미는 그동안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