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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May 13. 2023

불행복과 불면증에 절여진 크림소스 파스타

방관일지 EP.3

    "다시는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겠다는 나날들을 삼켜가며."




    오늘은 제발 꿈꾸지 않기를. 오늘은 제발 푹 잘 수 있기를. 내일은 제발 눈을 떴을 때 개운하기를. 자기 전, 이 세 가지를 곱씹은 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잠에 들기 두려웠던 건 7살 무렵, 이상할 정도로 계속된 악몽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나를 향해 추격해 온다는 막연한 두려움. 조금 답답한 호흡.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추격자의 얼굴. 그땐 몰랐다. 차라리 지옥 같은 악몽과 숨통을 조여 오는 가위가 훨씬 낫다는 것을. 악몽과 가위는 내겐 일상과도 같았다. 처음은 대부분의 인간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손발을 움직일 수 없었고, 숨이 턱 막혔다. 시야가 아득해지고 세상이 검게 물드는 듯한 느낌. 축축하게 젖은 손아귀를 펼치면 찌릿하고 전해져 오던 옅은 통증. 깨어나도 그 통증은 이어졌다. 어느 날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깨어나고, 어느 날은 입안 살을 가득 베어 문 채로 깨어났다. 나는 꿈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그날의 기분과 컨디션보다는, 꿈에서 겪었던 상황과 감정 혹은 통증 따위의 여파가 거의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랬다. 나는 깊게 잠을 잘 수 없는 인간이었다. 항상 옅게 자거나 기절잠이 전부였고, 며칠 밤을 지새우고 잠을 자도 다음 날이면 다시금 이딴 몸뚱이로 돌아오고 말았다. 특히 가장 힘든 꿈은 끝없는 시간 선상에 놓이는 꿈인데, 내가 그린 최악의 시나리오가 고스란히 실행되고는 홀로 벌판에 남겨지는 꿈이라고 하면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언젠가 본의 아니게 기숙사 사람들을 놀래 켠 적이 있었다. 잠에서 깬 직후, 옷장에 기댄 채 말없이 30분 넘게 있던 적이었다. 그날은 꿈속에서 300년을 헤매고 다녔다. 300년간 느낀 무력감, 자책, 후회, 실망, 분노, 기쁨, 슬픔. 모든 감정들과 시간이 얽혀 멘탈에 안정이 필요했었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시간의 흐름도 전부 느낄 때가 있는데, 저 때가 그때였다. 이 밖에도,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다른 사람 인격에 들어가 꿈을 꾸는 등. 정말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기이한 꿈을 많이 꾸며 살아왔다. 아무튼. 내가 말하려는 건 이런 변신로봇처럼 판타지스러운 꿈이 아니다.



    나는 평소 여러 인물들이 꿈에 나오곤 하는데,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라던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던가, 소중한 인연이라던가. 그렇다면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할 꿈인데, 꿈이란 녀석은 참으로 애석했다. 내게 행복이란 감정을 쥐여주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겐 늘 부정적인 형상만 띄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나라는 사람은 행복과 불행이 서로를 철저하게 견제하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행복을 받아들일 수 없는 저주받은 마인드에 온갖 부정적인 시선이 겹쳐진 탓일까.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행복하지 않길 바라는 게 가장 큰 이유 같았다. 이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불면증과 크나큰 연관성이 있는 점이라고 들 수 있었다. 왜냐하면. 꿈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만을 정확히 후벼 팠다. 가장 바라지 않는 관계의 종말만을 그렸다. 결정적으로 회색 풍경의 시발점을 끊임없이 경고하려 들었다. 나는 평생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죽을 때까지 철심을 심장 중심부에 꽂아야만 하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안고 있었다. 



    이런 말이 있다. 


    행복할 때가 가장 슬퍼. 지금 이 행복이 유일한 행복일 거 같아서.


    불행과 행복은 가장 모순적이면서도 닮아 있다. 행복에 취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불행이 찾아왔고, 불행에 절여져 취할 때쯤이면 행복이 비집고 들어왔다. 죽음은 가장 일차원적인 행위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다 포기하고 죽고 싶어 진다던데. 나는 대체 그 시기가 언제 찾아오려나 미친 듯이 기다려도 오지 않더라. 그냥. 그저.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죽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기혐오? 친구, 지인이라는 인간들과 어울리는 거울 속에 나는 구역질 나는 눈을 하고 있었다. 다 아는 듯한 눈동자를 띄고는 누구보다 슬픈 이면을 감추고 있었다. 입꼬리는 웃고 있으면서 세상 뒤틀린 듯한 흐리멍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기 싫었다. 모두의 호의를 배신하는 듯한 기분이었고, 사실 그 호의조차 가식이라며 뭐든지 의심하게 설계된 뇌를 씹어먹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까지 살기로 마음먹었다. 모두가 사라지는 꿈속 세상과 같은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버린 사람들을 비겁하게 숨어서 지켜본 이유였다. 사실 다 필요 없고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인데. 아직 만나지 못한 그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고, 앞으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무책임하게 내 불행과 저주를 떠넘겨도 웃을 수 있는 사람. 죽일 듯이 자책해도 혼자 두지 않을 사람. 내가 세상을 등질 때, 내 등에 기대어 줄 사람. 그 사람이 필요했을 뿐인데. 내 불행의 파편 극소량을 섭취하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전부였다. 적어도. 딱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같은 구차한 원망은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뚫린 입이라고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뱉었다. 철저히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래야 다시는 누군가가 나로 인해 다치지 않을 테니깐. 



    까지를 해피엔딩으로 끝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동물이고, 후진 생각 역시 다듬어지고 갈리기 마련이었다. 부정적이고 불행한 일들을 머금은 잡념들이 조각칼이었다면 나는 거칠고 투명한 대형 상아였다.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았던 시간도 조각칼에 깎여나가 어느새 조각품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적어도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을 나누고 싶진 않다. 엔딩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직 인트로조차 시작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았기에, 홀로 이 이야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시간과 싸웠기에.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지금도 나를 저주한다. 나는 내가 행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불행복. 늘 나에겐 불행과 행복이 함께 왔다. 2020년이 불행이었다면 2021년은 믿을 수 없는 행복이었다. 맞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불행하다. 최근엔 세상이 잠깐 회색으로 보일 뻔도 했다. 그나마 쉬지 않고 정신을 수양하기에 체내에 내공을 형성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요즘은 단전 혈도를 뚫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드디어 이 사람이 미쳐 버린 걸까?라고 생각이 든다면. 난 원래 항상 미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불행복. 대체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왜 이렇게도 미치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 사실 미치지 않았다. 분명 처음엔 미친 거 같았는데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차분해졌다. 감정이 줄어들고부터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최근에 꽤나 흥미로운 것을 읽었다. 가끔 드물게 감정 부분에 특이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보통의 사람이 가진 감정 공감 능력이 10이라면, 1만 하고도 2천이 넘는 감정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감정적이고 감성적이며 공감 능력이 풍부한 거 같아도 결국 10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이냐면, 과연 1만 하고도 2천이나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감정 능력이 0에 수렴하는 극한의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이 사람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스스로가 남들과 다르다고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기에 두려움이 있어 누구보다 이성적인 모습을 하고 산다는 것이다. 또한 지나치게 타인의 감정에 동화되어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도 있다고 한다. 이걸 읽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크림소스 파스타인가. 



    나는 당신이 혼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웃는 모습 그 모습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젠 확실히 알았다. 그때처럼, 저번처럼, 예전처럼. 내 불행을 탓하며 당신을 버린다고 나아질 건 아예 없다는 것을. 무엇보다 이기적이며 치졸하고 나약했다는 것을. 당신들은 죽는 순간까지 혼자가 아닐 것이다. 모순이 만들어낸 행복이 불행을 막을 것이며, 유연한 행복의 도로를 부드럽게 깔아줄 것이다. 



    불행복은 불면증에 절여져 있다. 먹기 좋게 차려진 행복에 따뜻한 불행을 얹고는 불면으로 풍미를 더한다. 먹음직스럽게 장식한 그릇 위로는 쿰쿰한 희망이 널브러져 있다. 유통기한이 30일도 더 지난 섞은 우유 냄새를 닮아 있는 이 요리는. 마치 내가 먹지 않는 크림소스 파스타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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