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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방관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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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Jul 17. 2023

그깟 비가 대체 뭐라고

방관일지 EP.8

    또 세상에서 멀어졌네.

    건반처럼 수놓인 이 지루한 세상에서.


    바닥에 들러붙은 껌자국이 유난히 많이 보이던 날이었다. 얼마나 많이 밟혔을까. 새카맣게 변한 껌덩이가 다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보였다. 한참 상념에 빠져있을 무렵, 무심하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둑. 툭. 갑작스러운 빗줄기에 사람들은 발걸음을 빨리 움직였다. 비를 피하기 위해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 편의점에서 방금 새로 산 비닐우산을 펼치는 사람. 양손에 든 짐더미가 집체만 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나는 뿌옇게 변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너희는 너희가 왜 내리고 있는지 알아?


    도로 위 떨어지는 저 비참한 빗줄길 봐.

    자기가 흘러내리고 있는 이유도 모르잖아.


    비 오는 날이 싫다. 하늘에서 무책임하게 쏟아지는 묵직한 물방울이 괜스레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날씨가 울적해서 심란한 건 절대 아니다. 날씨가 울적한데 하필 심란하게 비까지 내려서 그런 거다. 비는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 괜히 비 오는 날 듣는 우울한 플레이리스트를 틀게 하고, 잊었던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따금씩 이런 생각도 하곤 한다. 도로 한복판으로 뛰쳐나가 온몸을 적시고 싶다는 생각. 도로의 차들이 연신 경적을 울려대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당황한 경찰들이 내게로 뛰어오는 그런 풍경. 그 혼란 속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도로에 누워 비를 맞는 나. 그냥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앞서 말한 것과는 다소 모순적인 부분이 있지만, 빗방울이 살결에 닿는 느낌은 정말 최악이다. 나는 항상 5인용 대형 우산을 쓰고 다닌다. 단 한 방울이라도 몸에 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큼직한 우산을 들고 있으면 안전하다는 생각에 만족했다가도 이렇게까지 하게 만드는 비가 원망스럽다. 이깟 비가 대체 뭐라고. 


    그깟 내리는 비. 

    이게 대체 너한테 뭔데. 

    그냥 축축한 녀석인데. 


    새벽 다섯 시 무렵에 눈을 뜰 땐, 늘 같은 꿈을 꾸고 일어났다. 어금니를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턱이 아플 지경이고, 미지근한 날숨이 꿈에서 깬 것을 자각시켜 줬다. 지독하게 끈적한 땀방울도 이마를 가득 적시고 있었다. 악몽은 항상 말없이 찾아왔다. 우연인지 매번 같은 악몽을 꾸면서 눈을 떠보면 깬 시간도  비슷했다. 나는 익숙한 듯 일어나서 땀을 웃옷으로 대충 닦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건물을 뛰어다니는 꿈. 항상 같은 꿈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악몽을 겪어봤지만 이토록 집요하게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꾼 적은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다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일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별 일 아니라고 정말 괜찮다고 합리화할 때부터였을까. 구겨진 미간을 애써 모른척하며 미소 지을 땐 이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울 때였을까. 건물은 항상 텅 비어 있었다. 하늘은 짙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벽이 온통 적갈색인 건물은 생전 겪어본 적 없는 기괴한 곳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달렸다. 건물을 구석구석 살펴도 보이는 건 없었다. 그래도 달렸다. 꿈에서 깰까 두려웠다. 이번에도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을까 봐.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어디선가 거대한 눈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떠나질 않았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끔찍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꿈에서 깨기 직전엔 한 가지 문장만 쉬지 않고 외치며 깨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볼 수 있게.라고. 그렇게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왜 힘든지 그냥 묻지 마. 

    하늘에서 내리는 비 한 방울, 그깟 비 한 방울 때문이니깐. 


    비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는 건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낭만적인 무드와는 거리가 있지만 아무튼 나 자신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분위기인 건 분명하다. 사람들은 비 오는 날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울적한 기분을 들게 하기도 하고 나처럼 심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만들기도 한다. 비가 그친 후에 올 밝은 날이 기다려진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참 부럽다. 비가 갠 뒤 뜬 무지개를 보고 예쁘다며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깐. 나는 비가 그치면 기분이 한층 더 울적해진다. 또다시 올 비 오는 어느 날을 견뎌야 하니깐. 그럼에도 나는 빗길을 헤치며 살아간다. 그냥 지기 싫어서.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깟 비가 대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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